아길라는 없고, 에녹은 있다.
그건 다리이기도 하고, 마음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사랑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날 때부터 몸이 서로에게 붙어 있는, 통칭 샴쌍둥이인 아길라와 에녹은 갓난아기 시절 둘 모두의 생명이 위태로웠던 터라 분리 수술을 받게 된다. 의사들은 에녹으로부터 아길라를 떼어냈고, 이 과정에서 인물들 모두 아길라의 죽음을 점쳤다. 하지만 기적적이게도 아길라는 하반신을 잃었음에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다. 7년 정도만.
7살이 되는 해, 하녀장으로부터 자신이 본래 죽을 운명이었다는 것을 들은 아길라는 부모님이 두 사람의 목숨을 저울질한 후 에녹을 골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때 무언가를 깨닫게 된 아길라는 분노에서 돋아난 폭력성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이 밑은 약 17화까지의 내용만을 포함한 리뷰입니다.)
아길라의 분노는 복합적인 요인들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그 중 가장 직관적인 것은 하반신의 부재다. 그녀는 에녹에게 “난 너에게 내 다리를 양보한 거야.” 라고 말한다. 자신이 처한 부당한 상황과 고통 때문에 아길라는 다리를 되찾을 방법에 몰두하게 된다. 그 결과 그녀는 악마를 부르는 마법에 손을 대고 만다. 에녹을 꾀어낸 아길라는 마법 문양을 그려 다리를 되찾으려 한다. 하지만 마법을 발동시키기 직전, 부친인 윌스턴 남작이 문양을 발로 망가뜨린 끝에 기어이 실패하고 만다. (여기서 아길라를 방해하는 것이 발인 것이 재미있었다.)
이 실패는 예견되어 있었다. “나는 내 다리를 돌려 달라고 할 거야.” 아길라는 그렇게 말했지만, 실상 에녹은 남자다. 그녀가 에녹으로부터 돌려받을 다리는 본래 그녀의 다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언제나 밤인 세계>는 일면, 엘렉트라 콤플렉스와 같은 프로이트적 정신분석학의 은유처럼 보인다. 일차적으로 아길라는 자신의 결핍을 부재하는 하반신에서 찾으며, 이를 에녹으로부터 되찾음으로써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현실로부터 탈출하려 한다.
여기서 만약 아길라가 성공하여 에녹의 다리를 쟁취했거나, 실패한 이후 아길라가 자신의 모친에게만 폭력의 칼끝을 향하는 전개가 나왔다면 나는 이 작품을 계속해서 프로이트적 사고에 입각하여 독해했을 테고, 아마 5화 이후로는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프로이트의 관점을 웃어넘기는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그의 이론에 한정되어 인물들이 주조된 소설은 재미없고, 요즘 시대엔 고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관점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
<언제나 밤인 세계>는 그보다 더 깊고 매혹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길라가 첫 실패 이후 두번째로 마법을 시도하는 것은 그녀가 이미 이성과 자신을 꾸미는 것에 호기심을 보인 이후다. 신체적 차이를 인지 또는 이해한 것인지, 이번에 그녀가 시도하는 마법은 자신과 에녹의 몸을 바꾸는 것이다. (이 때 비단 아길라만이 아닌, 에녹 또한 서로의 신체를 동일시하는 관점을 보이는 것이 굉장히 흥미롭다.)
여기서 아길라의 분노를 구성하는 또 다른 요인을 엿볼 수 있다. 아길라는 에녹을 질투한다. 단순히 다리 때문이 아닌, 부모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도. 그녀는 윌스턴 남작이 에녹을 바라볼 땐 소중한 보석을 바라보듯 본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에서 멜라니 클라인의 이론이 떠올랐다. 프로이트를 계승하면서도 전혀 궤를 달리한 클라인은 관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 중에서 그녀는 질투를 파괴적인 충동으로부터 줄기를 뻗은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렇기에 아길라의 폭력적 행동을 이해하는데 클라인의 관점이 한 가지 유용한 도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처음에는 프로이트의 뒤통수가, 그 다음엔 그걸 노려보고 있는 클라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실 이 작품을 정신분석학에 입각해서 읽어본 것은 정신과 의사인 쉐이든 박사라는 인물의 등장 때문인데, 그는 일찌감치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니 이 관점을 오래도록 고집할 이유 역시 없다고 생각한다.
아길라/에녹은 입체적인 캐릭터다. 여러가지 면모가 있고, 그(녀)의 분노와 폭력성의 기저에는 복합적 요인들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니 단순히 정신분석학으로 그(녀)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판단해선 안 된다. 일례로 애초에 그(녀)의 분노와 폭력성이 1화 이후에 후천적으로 조성된 것이란 단서가 있다.
쉐이든 박사는 아길라를 사이코패스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아길라가 애당초 무언가를 아낄 줄 모르는 것은 아닌가 의심했지만, 7살 이전에 아길라는 에녹을 끔찍하게 아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이후에도) 그녀는 7살이 되어 자신을 둘러싼 진실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분명 밝고 행복한 아이였다. 유사하게 에녹 역시 누이를 생각하는 착한 아이였다. 하지만 아길라의 몸에 들어가고 불편을 겪은 순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언제 자신의 몸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누이와 가족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한편, 점점 정신적으로 망가져 가는 모습을 단편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길라는 없고, 에녹은 있는 것이 그렇다면 무엇일까? 두 인물은 이제 서로의 상황이 뒤바뀐 체험을 하며 서로가 가졌던 것과, 갖지 못했던 것을 알아가게 되지 않을까.
이 부분이 작품의 앞으로의 전개와 연관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누가 선천적으로 악마일까? 윌스턴 남작부인이 읽은 책에는 “말을 타고 도망치는 것은 아름다운 숙녀요, 그 뒤에 탄 것은 악마이니.” 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사실 아길라가 아름다운 숙녀고, 휠체어가 말이었으며, 에녹이 악마일 가능성은 없을까? 10화의 서두에 나온 “모든 사람의 눈에 지옥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라는 문장이 의미심장하게만 보인다.
물론 아직 결말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가능성을 이야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나면 끊임없이 앞으로의 전개, 또는 결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언제나 밤인 세계>는 빠른 전개 속에 다채로운 감정과 복잡한 서사를 유려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섬세하게 짜인 장면들과 이야기 속에 숨겨진 복선들이 한 눈 팔 틈을 주지 않는다.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다. 반짝이는 물건을 찾은 까마귀처럼 화면에 눈이 고정된 채 쉴 틈없이 읽어내려 갔다. 작품이 당도할 결말이 너무나도 궁금하다.
명대사로 글을 끝내면 어딘가 허세가 충만해 보여서 좋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영화 데미지에 나온 명대사를 적고 싶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조심하세요. 그들은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여담 1) 모리세이라는 인물이 굉장히 마음에 듭니다. 커피에 설탕과 우유를 넣지 않다니, 아주 훌륭한 인물입니다. 사실 하지은 작가님의 전작들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댓글을 통해 알았는데 이전 작품들에도 등장한 인물인 듯하네요. 알게 된 김에 이전 작품들을 먼저 읽고 다시 읽기 위해서 잠시 독파를 멈춘 상태입니다. 이전 작품들을 읽지 않아도 상관없을까요?
여담 2) 저는 정신분석학을 별로 안 좋아합니다. 작품을 읽는 여러가지 도구들 중의 하나 정도로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