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수성과 금성을 모두 먹어치우면서 지구와 0.3AU 가까워진 세계. 거기에 알 수 없는 증상으로 사람들은 모두 미쳐버린 세상에서, 지금의 유일한 내 관심사는 이미 미쳐버린 애인, 루시뿐이다.
거기다가 미래에서 왔다는 거대한 해양 생물들은 불가사리라는 괴물이 이 세계를 모조리 먹어치울 거라고 하는데…
어쨌거나 루시를 위해서라도 이 세상은 존재해야 한다. 그곳이 설령 내겐 지옥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개인적으로 작품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작가가 중간부터 방향성을 잃은 듯 보였기 때문인데, 다만 작품을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나갈 수밖에 없는 독자와 전체적인 구상을 잡고 시작하는 작가의 시선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완독한 시점에서 작품 소개를 다시 읽어보니 결말에 대한 복선으로도 읽히는 부분이 있어서 그렇다.
처음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태그란에 붙어있는 #타임리프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타임리프 태그가 붙어있는 작품이 리뷰 공모에 올라온 거라면, 그건 피드백을 받아서 수정 후 이번 타임리프 공모전에 응모를 하겠다는 얘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마침 나도 공모전을 준비 중이라 경쟁자를 염탐해 볼 요량으로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꽤 긴 분량이지만 그건 오히려 좋았다. 안 읽히면 흔쾌히 그만 읽을 수 있으니. 오히려 분량이 짧은 단편인 편이 ‘조금만 더 읽으면 되는데 그냥 참고 읽을까’라고 생각하게 돼서 까다롭다.
아무튼 그렇게 손에 들고 2화까지 읽었을 때 나는 반쯤 공모전에 대해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와 이건 못 이긴다. 이건 무조건 수상작이다. 이를테면 엔도 히로키의 에덴 같은 매력적인 불친절함, 폭력성, 분위기, 견고한 필력, 거기에 소재의 특이함까지. 심지어 메인인 타임리프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다. 태양이 가까워지고 해수면이 상승하고 해광증이라는 신종 질병이 창궐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인어가 돼버리고 말하는 문어가 등장했는데 여기서 타임리프까지 나온다고? 이건 닌자의 등장을 넘어서는 흥미로움이다… 그러나 막상 보고 나니 기대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 타임리프는 독으로 보인다. 외려 반대로 타임리프 부분을 후반부에 배치해 초중반부는 재밌게 읽게 만들었으니 낚시의 달인이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나는 타임리프 이후의 전개에서 예전에 읽었던 어느 작법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한 작품 안에서 두 번 이상 장르를 바꾸면 안 된다는 얘기였는데, 그때부터는 독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감상평을 남기는 측에서, 이와 같은 장르 이탈 문제를 지적할 때의 걸림돌은 그것이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에 대해선 생리적으로 별로라고 말 외엔 대답을 찾지 못했다. 굳이 꼽자면 타임리프 장르를 표방함에도 작품의 재미에 복무하기 위한 타임리프가 아니라 이야기를 매듭짓기 위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서의 타임리프처럼도 느껴진다는 의구심 정도일까.
개인적으론 이 작품이 데빌맨 2, 3권과 아주 유사한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이들의 의견도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