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극히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어느 날 자연스레 집 안에 머물러있는 낯선 이는 주인공의 눈에 포착된다. 부스스한 머리에 누렇게 뜬 피부, 심지어 자신을 제외한 가족 중 아무도 그 사람을 보지 못한다! 주인공은 생각한다. 저건 인간이 아니야.
주인공이 ‘저것’이라 부르는 낯선 이. 그는 자연스레 오랜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의 자리에 앉아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기까지 한다. 주인공은 그 불쾌함과 압박에 밥도 제대로 넘기지 못한다.
도저히 고개를 들어 그것을 바라볼 용기가 생기질 않는다. 멋모르고 처음 바라봤을 때의 그 공허한 눈이 기억 속에 들러붙어 나를 괴롭히고 있다.
이방인은 집 곳곳에서 ‘나’의 눈에 의해 발견되고, 심지어는 동생에게 도움을 청하려 할 때엔 ‘나’를 노려보기까지 한다. 부술 듯 두드렸던 문, 짜증스런 동생의 표정, 주인공을 노려보는 이방인. 주인공은 차마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린다. 여동생은 분명 공포에 질린 모습을 보았을 텐데도
“변태 새끼가 뭐하는 거야? 저리 안 꺼져?”
라며 매몰차게 문을 닫는다.
‘낯선 이’는 도대체 무엇일까? 인간은 아니라 하였으니, 그럼 귀신? 아니아니, 작가는 그렇게 뻔한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아니라면,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공포, 혹은 불행 따위이지 않을까.
작가는 의외로 처음부터 답을 내주었는지도 모른다.
동생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한 게 언제더라?
(중략)
녀석과는 거의 일방통행적인 짤막한 지칭과 지시어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는다.
아빠는 집에 자주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밤늦게 돌아와서 잠만 자고 나가는가 하면 아예 며칠씩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중략)
아빠에게 다른 애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아빠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마다 엄마의 말수는 점점 줄어들어 그나마도 간간히 이어가던 집안의 대화는 그것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다. 주인공을 짓누르기 시작한 이 가정에 찾아온 것은, 가족 구성원 서로가 ‘이방인’인 집 안의 분위기인 것이다. 아빠와도, 엄마와도, 심지어 동생과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가족. 모두가 모두에게 이방인인 가족은 주인공을 숨막히게 한다.
이방인이 되어버린 가족. 주인공은 가족과의 대화를 다시 이어가려 애쓰지만 이미 서로에게 낯설어져버린 가족은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
“아……, 아빠는 오늘도 늦으신대요?”
(중략)
“나도 몰라.”
(중략)
그걸로 끝이었다.
엄마도,
“야 밥먹어”
대답은 없었다. 이를 테면 커다랗게 틀어놓은 노랫소리가 자기에게 신경끄라는 자기 주장인 셈이다.
동생도
대화를 이어가려는 의지따윈 없다. 고작해야 공포에 가득찬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오빠를 보며 저리 꺼지라는 말이나 할 뿐이다. 혼자가 되었을 때 찾아오는 외로움,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공포는 주인공마저 다른 가족들에게 ‘이방인’이 되는 것으로 이 소설은 마무리된다.
어쩌면 진부한 이야기지만, 함께 모여 이야기할 시간도, 함께 식사할 시간도, 느긋하게 대화할 마음의 여유도 없이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분위기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가장 가까운 이들을 만나면서도 스마트폰을 부여잡고 기계와 대화하는 우리의 삶에도 언제 이방인이 찾아올 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