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먼저 읽고 ‘괴담’ 본편을 읽으시면 웬 뚱딴지냐고 생각하시겠지만, 본편을 먼저 읽고 오시면 그나마 아주 뚱딴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니 아직 본편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가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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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떤 사내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칠남매 중 셋째로, 형제자매 가운데 가장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어마어마한 대성공까지는 아니에요. 다만 식구들을 굶기지 않을 정도는 되었습니다.
사내는 스물여섯에 결혼해 이듬해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뒤로 딸도 생겼지만 그 사실은 생략해도 좋을 것입니다. 일단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이니까요.
사내는 남편으로서는 어떨지 몰라도 아버지로서는 자식에게 무척 엄했습니다. 그는 자식에게 허술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던 것 같아요. 아들이 아버지를 존경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내와 그의 아들은 상극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보색 관계였지요. 어쩌다 우연히 부자의 연을 맺지 않았더라면 둘은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엮이지 않았을 거예요.
사내는 외향적이고 진취적인 인간이었습니다. 우두머리 기질이 있어 곧잘 나서서 상황을 주도하곤 했습니다. 반대로 그의 아들은 내향적이고 온중한 성격이었습니다.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멀리서 관조하기를 원했지요. 한 가지 행동에 앞서 열 가지를 생각하는 타입이었어요.
사내는 아들이 자신의 삶의 방식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아들도 자신처럼 성공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성공하는 방식을 한 가지밖에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웅변 학원도 보내고 태권도장에도 보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웅변 기술이 늘고 태권도 품새를 익힌들 아들이 타고난 것은 바뀌지 않았지요. 나이가 들수록 사내의 아들은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고, 결코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자연히 깨달았습니다. 사내가 이 사실을 인정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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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 중간 시기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사내는 일요일 아침마다 초등학생인 아들을 데리고 뒷산에 올랐습니다. 구의 경계에 있던 높지 않은 산이었는데, 산책 코스를 따라 욕심내지 않고 걸으면 두세 시간 정도가 소요되었습니다.
이러한 주일 일정을 아들은 끔찍이 싫어했지만 아버지를 거역할 바에야 두세 시간 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군말없이 따라나서곤 했습니다. 사내가 그 시간을 즐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아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한다는 것은 확실했지요. 하지만 그 때문에 스스로도 내키지 않는 일을 벌인 거라면….
산책로를 걸으며 사내는 아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다지 이상적인 대화는 아니었어요. 번번이 사내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양새가 되었으니까요. 그는 무심한 아들을 야속하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들은 아들대로 불만이었습니다. 아들이 무슨 책에 관심이 있고 무슨 노래를 즐겨듣는지, 친구들과 만나면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사내는 아들의 시험 일정이나 시험 범위, 성적 등등에만 주로 관심을 보였거든요. 그러고서 이어지는 것들은 으레 집중력, 정신력, 헝그리정신 등등에 관한 일장 연설이었습니다. 산길을 걸으며 누가 그런 얘길 할까요? 사내가 했습니다. 이쯤 되면 무심한 것이 누구이며 야속하다 생각한 게 누구였을지 재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날도 사내는 대화를 가장한 훈계를 일삼으며 아들을 산등성이로 이끌었습니다. 거기엔 꽤 넓은 공터가 있고 그 둘레에 각종 운동기구가 배치되어 있었어요. 애당초 산속에 운동기구를 설치하는 정신머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나, 사람들은 또 그런 게 있으니 괜히 한 번씩 툭툭 건드리겠지요. 그러는 걸 보고 또 옳다구나 하며 다른 산에도 설치를 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아무튼 사내와 아들도 관성적으로 공터에 멈추어 운동기구 앞으로 갔습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언가란 반으로 접힌 채 교묘하고도 인위적으로 나뭇가지에 끼워진 새하얀 종이쪼가리였습니다.
“이게 뭐지?”
사내가 발견했는지 아들이 발견했는지 모르니 저 말을 누가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글쎄(요).”
이 말도 누가 했는지 모르겠군요.
쪼가리를 펼치니 글자가 나타났습니다. 검정색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어요. ‘3등’이라고요.
이윽고 다른 운동기구 근처에서 또 다른 쪼가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번엔 ‘5등’이었지요.
그것은 보물이었습니다.
공터 한쪽에는 무슨무슨 교회 야유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거기엔 작은 글씨로 행사 내용이 쓰여 있었으며, 그 중에는 보물찾기도 있었습니다. 1등 경품은 자전거였습니다. 오후 시간인 걸로 봐서는 예배를 마치고 다함께 올라오는 듯했어요.
즉, 사내와 아들은 보물찾기의 보물을 미리 찾아냈던 것입니다.
둘은 모처럼-어쩌면 그 해 처음으로-마음이 맞았습니다. 진짜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마구 들떴어요. 그리하여 공터를 잰걸음으로 빙빙 돌며 곳곳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전부 찾아냈지요. 더러는 뻔한 데 있었지만 몇몇 쪼가리는 아주 구석진 데 있었습니다. 어쨌든 오래 걸리지 않아 쪼가리 십수 개가 사내와 아들의 손에 들려 있었어요.
“이제 이걸 어쩌지?”
“다 가져가 버릴까요?”
사내와 아들이 낄낄 웃었습니다.
“한 군데다가 몽땅 숨길까?”
둘은 다시금 낄낄거렸습니다. 지나가던 행락객이 힐끔 쳐다보았지요.
“다시 숨기자. 더 어렵게.”
사내와 아들은 또다시 공터를 빙빙 돌면서 여간해선 찾아내지 못할 곳에다가 세심히 보물을 숨겼습니다. 자전거를 받는데, 못해도 공책을 받는데, 마땅히 그 정도 수고는 해야겠지요.
얼마쯤 기다렸다가 교인들이 쩔쩔매고 당황하는 모습을 지켜볼 의향도 있었지만 둘은 결국 산책로를 되돌아 집으로 갔습니다.
그날의 사건은 그게 전부입니다. 사내와 아들은 이후 보물찾기에 대해 한 번도 서로 이야기한 적이 없고 둘은 다시 예전처럼 서먹한 사이로 돌아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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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까지 하고서야 사내는 아들이 자신의 길을 따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했습니다. 돌이키기엔 아들이 너무 멀리 가버렸겠죠. 아쉬워했을지 대견해했을지 모릅니다. 안 물어볼 거고요.
사내와 아들은 다른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무언가를 진심으로 공유한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이며, 그날의 보물찾기는 아마 그 중에 하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껏해야 종이쪼가리 몇 개나 찾았을 뿐 대단한 사건도 없었고 상대에게 마음을 터놓은 것도 아니며 대화도 거의 없었지만 그날 그들은 처음으로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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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것이 제가 ‘괴담’을 읽고 낡은 기억 창고에서 끄집어낸 이야기입니다. 위와 같은 경험들은 누군가를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닐지도 몰라요. 하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고 의식 저변에 가라앉아 있다가 이따금 변덕스레 떠오르겠지요. 교회 야유회 현수막을 볼 때, 혹은 낯선 여인이 길을 물을 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