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무렵 방에 앉아 이토 준지의 호러 만화를 보는 중이에요. 밖에서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더니, 소복을 입은 백발의 노파가 공동묘지 방향이 이쪽이 맞느냐고 물어요. 우리 동네에 웬 공동묘지? 라고 생각하던 당신은 언덕 위의 초등학교가 옛 공동묘지 터에 지어진 것이라는 소문이 기억나요. 고개를 끄덕이고 노파가 떠난 후에야 생각나죠. 당신의 방이 2층이었다는 사실이.
위 이야기에서 가장 무서운 순간은 창밖에 사람이 지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바로 그때입니다. 그전까지는 그냥 께름직한 수준이죠. 엄성용 작가님의 단편 <메일을 공개합니다>에도 이처럼 알고 나면 더 사악하고 무서운 부분이 있어서 얘기해볼까 합니다.
힌트: 행운의 편지, 영화 <링>
작품의 화자는 엄성용 작가님의 필명이기도 한 후안이라는 이름의 공포소설 작가입니다. 본인의 팬이라는 남자에게서 온 메일을 공개하는 내용이지요. 메일의 발신자는 창에 비친 꾸물거리는 얼룩을 본 이후 벌어진 공포스러운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퇴마사도 아니고 공포소설 작가인 후안에게 왜 이런 메일을 보냈을까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미지의 존재가 메일 발신자에게 ’이제 한 번 남았는데’라는 경고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검은 얼룩을 세번째로 마주치기 전에 그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영국 런던에서 시작된 행운의 편지처럼. 또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사다코가 나오는 우물이 찍힌 비디오테이프를 복사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던 <링>의 주인공처럼.
두번째 이유는 후안이 많은 독자를 보유한 작가이기 때문입니다. <링>의 후속편 중에 비디오테이프의 영상을 텔레비전 방송으로 송출하는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제 왜곡된 기억인지 확실치 않네요. 영화 <원더우먼 1984>에서 맥스 로드가 전파를 장악해서 ‘소원을 말해 봐’를 부르는 장면이나 곽재식 작가님의 <이상한 녹정 이야기>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후안이라는 작가를 통해 수많은 독자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검은 얼룩의 계략이었던 것입니다!
<메일을 공개합니다>라는 작품을 읽은 모든 사람이 이제 검은 얼룩의 위협을 받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는 뜻이죠. 이 참혹한 대량살상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엄성용 작가님이고요. 그리고선 태연하게 작가 코멘트에 ‘저 멀쩡합니다’라고 남겨 놓았네요. 그러시겠죠. 검은 얼룩의 시선을 독자들에게로 돌리는데 성공했으니까요.
자, 이제 당신도 제가 이 리뷰를 작성한 이유를 깨달으셨나요? 제 휴대폰 액정에 검은 얼룩이 보였기 때문인데, 당신이 이 리뷰를 읽어 준 덕분에 저는 안전합니다.
그럼 행운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