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극히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나는 자년(子年) 자시(子時)에 태어났다. 궁의 신녀였던 어머니는 내가 쥐의 팔자를 타고 나서 재물복이 많고 자손이 번성하며 다복하게 살 것이라 했다.
한켠 작가의 서왕 삼부작의 시작인 「서왕」은 이름 그대로 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신녀였던 어머니는 쥐에 빗대어 자식을 축복한다. 재물복이 많고 자손이 번성한다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 그러나 축사가 무색하게도, 주인공의 눈에 비치는 쥐는 축복과는 거리가 멀다.
다 쓰러져가는 사형장 근처의 집일지언정 사람이 사는 곳일진대, 쥐는 기둥을 갉아대고, 음식을 먹어치우고, 아무데나 똥을 싸댄다. 심지어 닭의 항문으로 들어가 속을 다 파먹는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주인공은 잠든 사이에 쥐가 자신의 속을 파먹을까봐 깊이 잠들지 못한다.
그는 시취 가득한 그 곳에서, ‘시체 뜯어먹고 산다.’는 모멸을 견디며 살아간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기에 그는 쥐와 같은 삶을 벗어나고저 인생을 휘적인다. 그 자신이 왕의 사생아라는 주장에 이끌려 서 환관을 따라 궁으로 들어간 것이다. 왕을 알현하고, 잠깐의 소란 끝에 어머니의 목숨값으로 세자의 자리를 얻는다. 왕이 된다. 한날 한시에 태어난 이복형제를 그리워한다. 찾는다. 잡히지 않는다. 폭정을 펼친다. 이복형제와 닮은 환관과 신녀를 죽여댄다. 무리하게 제사를 지낸다. 그렇게 그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왕의 저주대로, 망한 나라의 군주가 된다.
「서왕」에는 이러한 대목이 나온다.
나는 왕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사형장 근처의, 그 쥐구멍 같은 집에서 탈출하고 싶었을 뿐이다. 죽은 사람 덕에 사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다. 어머니의 죽음도 모른 척 하고 대비와 서 환관의 쥐새끼가 되어가며 나는 쥐구멍에서 더 큰 쥐구멍으로 옮겼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그는 쥐구멍에서 더 큰 쥐구멍으로 옮겼을 뿐이라 말하지만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만 간다.
죽이고 수탈하는 것은 모두 ‘어명’이었다. 선왕의 ‘태평성대’는 지나갔다. 밤에는 제사를 지냈고 신녀를 바쳤다.
이 작품을 보고 있자니 몇 년 전 관람한 뮤지컬 <마리앙투아네트>가 생각이 난다. 루이16세도, 그의 아내도 필부의 삶을 꿈꾸던 ‘사람’일 뿐이라는 해석으로 진행되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미 군주이고, 백성들의 태양이었다. 태양이 빛을 비추기 싫다며 고개를 내밀지 않는다면 이 땅엔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백성들은 누가, 또 어떻게 왕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단지 그들을 다독이고 보살펴주고 잘 살게 해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왕은 어떠한가? 이복 동생의 허깨비에 마음을 뺏겨 애꿎은 백성만을 도살-그래, 이건 도살이다.- 하지 않았던가?
그의 삶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것이 잔인하게 백성들을 유린하고 죽이는 것의 변명이 될 수 있는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원했든 그렇지 않든, 자리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의 왕은 그러하지 못했다. 한 나라의 왕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을 쥐새끼라 믿으며 ‘쥐새끼들의 왕’으로 산 것이다.
안타까운 삶의 행적으로써 잔인하게 백성들을 짓밟은 그는, 결국 그 근원이었던 이복동생의 방화로 살던 곳을 잃게된다. 그는 끝까지, 쥐의 도움으로 생을 부지한다. 그래, 그는 결국 서왕(鼠王)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