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작은 약속을 하나 했었는데, 브릿G 리뷰어 활동을 하는 동안 오래된 지인의 작품 리뷰를 하지 않는 거였다. 누구에게도 해나 득이 될 것이 없는, 정말이지 개인적인 다짐이었다. 지인의 작품은 거리를 유지하며 감상하기가 힘들고, 또 리뷰어는 최대한 저와 상관없는 이들의 작품을 리뷰로 써서 홍보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청귤 작가의 작품은 한 번쯤 리뷰로 써보고 싶었다. 필자의 조악한 글솜씨로나마 해당 작가의 작품에 담긴 아스트랄함과 온기, 그리고 필자의 팬심을 전달해보고 싶어서였다.
브릿G에 올라온 김청귤 작가의 작품은 많다. <찌찌레이저>나 <편의점 시리즈>, <향초 가게 은하향 시리즈>, <살기 좋은 도시, 이츠 대전>과 <밤을 내뿜는 고양이>, <사정통>, <산타글로수> 등 대강 적은 것만 해도 이 정도다. 그저 ‘재수 없는 짓을 저지른 인간들이 죽는 이야기’란 표현으로 김청귤 작가를 정의할 수는 없다. 그런 얘기도 있긴 하지만, 한마디로는 정의하기 어려운 작가이다. 그만큼 작가의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필자의 표현력이 달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위 문단에서 언급한 ‘아스트랄함’과 ‘온기’는 분명 김청귤 작가의 작품에서 뺄 수 없는 핵심 요소이다. 언젠가 이 두 가지 특징을 위주로 김청귤 작가 특유의 동화풍 우주 큐레이션을 열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 혹은 다른 누군가가.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해저도시 타코야키>라는 작품을 이야기할 것이다.
제목만으론 도저히 내용을 짐작할 수 없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 소개를 봐도 그렇다. ‘해저도시에서 어떻게 타코야키가 있는 걸까요. 이미 바다는 죽어버렸는데…’ 사실, 김청귤 작가에게 직접 물었다. “작가님의 작품을 리뷰하고 싶은데, 골라주세요. 어떤 작품의 리뷰를 받고 싶으신가요?” 그랬더니 “아, 그러면 <해저도시 타코야키>로 해주세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네? 해저도시 타코야키…요? 그렇게 되묻진 않았다.
필자 또한 브릿G에 글을 올리는 작가이지만, 이런 소재의 이야기를 떠올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과장도 아부도 아니다. 대체 이 사람, 무슨 글을 쓴 거야? 하고 읽어봤다. 김청귤 작가답게 하나도 어려운 말들이 없고 흥미진진한, 그리고 예상보다 스케일이 큰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타코야키, 타코야키 트럭은 한두 사람이 앉아 타코야키를 구울 정도로 조그마한 이동 수단이다. <해저도시 타코야키>는 그 타코야키 트럭으로 세상을 뒤엎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세상을 뒤엎는 것은 타코야키 트럭의 주인 ‘루나’와 청소부 ‘문’이다.
이야기는 청소부 문의 시점으로 시작된다. 바닷물 아래 거대한 돔으로 형성된 해저 도시 ‘태양’, 그곳에서 문은 오직 돔 청소만을 목적으로 인공배양된 인간이다. 최대수명은 3년이다. 청소부는 죽은 청소부의 잔해로 만들어지는데, 그 과정에서 문은 본능처럼 ‘세상’에 대한 선험적 지식을 갖게 된다. 왜 바다가 죽어버렸는지를 알고, 춤을 추는 방법을 안다. 돔 벽 바깥에 낀 것이 물때뿐 아니라 빛나는 식물이라는 사실도 안다. 그리고 청소부로 태어나 청소부로 죽을 본능으로 그 식물을 밀어내버리지 않고,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줄도 안다. 기실 그는 최후의 인간이다. 이 글을 읽는 ‘우리’에 가까운.
딸랑딸랑 방울을 울리며 다니는 타코야키 트럭이 문의 앞에서 멈춰 선 것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 타코야키가 무엇인지 아는 존재는 문이 유일했으니까.
이름도 없고 가진 것이라곤 누더기 같은 옷과 맛없는 에너지바, 코드 번호뿐인 문에게 루나는 타코야키를 내민다. 문은 본능적으로 안다. 이것을 받아먹으면, 결코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란 것을 안다. 웃는 얼굴과 다정한 말로 건네는 이 갓 구워낸 음식을 먹으면 결코 혼자서 에너지바를 먹던 가슴 저미게 서럽던 날로 돌아갈 수는 없다. 에너지바를 먹지 않아 죽어버리더라도, 그래, 삶이 끝나더라도.
그렇지만 문은 타코야키를 먹었다.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았다. 그리고 타코야키를 대접해준 루나에게 문의 유일하게 귀중한 것, 돔 벽 너머의 빛나는 식물을 보여준다.
돔 아래 고여있던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코야키를 먹고 식물을 구경하면서. ‘아스트랄’하고 ‘온기’ 어린 방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야기의 결말은 여기서 적지 않겠다. 리뷰를 쓰고 있긴 하지만, 필자는 사실 ‘가서 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직접 보는 것만큼 해당 작품을 온전히 소유하는 방법은 없으니까. 세상에 나온 이야기는 작가의 것인 동시에 독자의 것이기도 하다. (저작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직접 읽고, 빛나는 식물과 타코야키 트럭을 가슴에 들이라고 권하고 싶다. 추운 겨울밤, 등롱을 내건 채 타코야키를 굽고 있는 작은 트럭의 존재는 얼마나 간절하고 따스한가. 특히 요즘같은 때엔.
<해저도시 타코야키>는 그런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