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경 작가님의 ‘전신보‘는 인간의 모습을 한 동물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는 독특한 세계관 내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엮어낸 작품입니다. 이렇게 멋진 작품의 리뷰 공모에 응한 분이 없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어쩌면 작품이 너무 뛰어나서, 선뜻 나서지 못하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며, 부족하지만 열심히 써 본 리뷰로 첫 물꼬를 터 보겠습니다.
작품은 산중호걸 호랑님의 생일잔치에 선물을 준비해 가는 여우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호랑이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데, 왠 나무꾼이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실존적 고민을 유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곰은 호랑이를 치고 권좌에 앉고 싶어하는데 갑작스런 공격을 받습니다… 음, 이쯤에서 더 이상의 줄거리 정리는 포기해야 할 것 같네요. 직접 읽어보세요. 위 내용은 시작일 뿐입니다.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정신없이 펼쳐집니다! 작가님 스스로 밝히셨듯, ‘마구마구 변신하는 이야기’ 입니다.
위 줄거리 소개에서 알 수 있듯이, 작품의 배경은 한국적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제가 읽은 판타지 작품들 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편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건국설화에서 곰이 인간으로 화한 이래 (사족이지만, 이 작품에서도 언젠가 단군신화가 언급될 것 같습니다ㅎㅎ 500원 걸어봅니다) 해모수의 둔갑술 대결 전승, 매구 전설이나 구미호 전설 등 많은 전래동화 이야기에서 동물이 사람으로 변하고 사람이 동물로 변하고 그래 왔지요. 그래서 오크나 트롤이 나오는 판타지에 비해, 이 작품은 분위기부터가 대단히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새롭게 재구성된 전래동화를 읽는 느낌이 들어서, 익숙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원전을 추정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제 취향이에요! 저는 이런 작품이 우리나라 판타지 계에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ㅎㅎ (그렇다고 제가 톨킨 세계관을 안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집에 반지의제왕 확장판 DVD도 있어요)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살아 숨쉬는 디테일입니다. 특히 서당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 중 희생자의 짚신에 개구리를 넣는다는 묘사는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디테일하게 세상을 그려낼 수 있으신 건지! 게다가 밥고리, 저포놀이 같은 한국의 냄새가 풀풀 나는 단어들도 조금 생소하긴 했지만 이 세계에 더욱 현실감을 불어넣어 줍니다. 생생한 묘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래와 같은 서술은 감탄을 자아냅니다.
방창한 계절이었다. 만엽이 우거진 틈을 볕뉘 몇 가닥이 용케 비집었다. 내리쬐는 햇발은 어느 몽땅한 등걸에도 닿으니, 검정고양이 한 마리가 그 위에 단정히 웅크려 있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작품 ‘전신보’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정신없이 전개되는 이야기겠지요. 저는 좋은 소설은 도입부부터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 ‘전신보‘는 그런 면에서 놀라운 작품인데, 작품을 이루는 각 회 하나하나가 저마다 새로운 소설의 도입부라고 생각해도 될 만큼 지루할 새 없이 눈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회의 시작마다 경이로운 필력에 목살이 잡힌 채 이야기에 정신없이 끌려들어가 빠져드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각 에피소드마다 후반부에서 ‘아 그게 이거였어?!’ 하는 놀라운 연결이 뒤통수를 때리는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가 생각나는 구성입니다.
일반적으로 소설을 읽으면서 기대하게 되는 기승전결 구조를 전혀 따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굉장히 실험적이라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물론 각 회차의 이야기마다 기승전결이 들어 있지만, 한 이야기 전체를 묶어 생각해 보면 가장 큰 줄기가 되는 내용이 뭔지 선뜻 답을 내기 어렵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줄거리를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중심 플롯 뿐만 아니라 한낱 엑스트라의 배경을 다룬 보조 플롯까지도 상당히 비중 있게 다뤄지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예능으로 치면 라디오스타 같고 게임으로 치면 엄청난 멀티태스킹을 펼치는 프로게이머의 플레이를 보는 것 같아요. 이것이 단점으로 될 수 있는 부분은, 글 전체의 호흡이 어떻게 되는지 감을 잡기가 어려워진다는 점입니다.
다만 제 미천한 추리력으로 메인 플롯이 뭔지 추정해 보자면, 바뀌었다는 왕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1막 ‘전신보’에서 호랑이에게 맡겨진 아이가 늑대 모래의 도움을 받아 왕을 치는 것이 메인 플롯인 것 아닐까요? 그렇게 보면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정말 도입부 중의 도입부에 불과한 거죠. 이런 큰 그림을 이런 밀도로 그려내시다니… 어마어마합니다.
위와 연결된 이야기인데요, 작가님의 끊기 신공이 워낙 롤러코스터 같다 보니,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A가 어떻게 될지 궁금증이 마구 차오르는데, 다음 화에서 갑자기 새로운 인물 B의 이야기가 나타나니 아무래도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이것은 대가들이 곧잘 빚어내는 효과적인 연출 방식이기도 합니다만, 각 화들이 각자 내는 목소리가 워낙 강해서요. 스펙터클한 내용의 B에 빠져 있다 보면 어느새 A에 대한 기억이 점점 아련해져 버리는 감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건 개인적으로 제 기억력이 좀 딸려서… 그렇게 느낀 것 같습니다…)
게다가 끝마무리가 명확하지 않은 일부 에피소드들은 일을 보고 뒷처리를 덜한 느낌이…ㅠ 이 회차들이 각각의 단편이었다면 열린 결말로 여운을 남기며 마무리되는 것이겠지만, 이 작품의 세계관은 실타래처럼 이어진다구요! 의생과 처녀는 그래서 어떻게 된 거죠? 여우는요? 사기꾼과 도둑과 살인자는요! 선암의 아버지는요! (스포일러)가 낳았다는 아이의 아비는 누구죠?! 물론 언젠가 떡밥 회수가 되겠지만, 이렇게 캐릭터들이 안개 속으로 홀연히 사라져 버리니 다음 화를 기다리는 것이 고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고문이 무서워 작품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그는 격이겠지요. 자, 그럼 다 함께 즐거운 고문을 당하기 위해 이 작품을 읽어 봅시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