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시인의 광야를 사랑합니다. 감히 미물이 손대지 못할 원대한 계획이 세상 단위로 흐르는 소리를, 나는 좋아합니다. 눈부신 붉음이 끝도 없이 번져나가다 어느 검은 선과 맞닿아 뭉개지고, 어둠으로 허물어져가는 그 순간의 정적을, 어떻게 한갓 인간이 좋다 아니다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본능으로 좋다, 아니다 생각하다 눈만 감을 수 있겠지요.
제가 이 글을 처음 접했던 때는 벌써 까마득합니다. 인터넷을 뒤져 아카이브로도 찾기 힘든 시절입니다. 작가님과 생일이 같은 인연으로 오래도록 그늘막의 민달팽이처럼 매달려 쳐다보며 흠모만 해 왔습니다. 이 얼마나 뻔뻔한 고백인지! 저는 한갓 미물입니다.
올리신 걸 보며 몹시 마음으로 읍소하며 하편이라도 유료로!를 외쳤습니다만 너무 옛 글이라 민망하다셨습니다. 에헤이, 감동에는 흘러간 시간의 장단이 없습니다. 오늘 쓴 글도 내일 보면 과거의 글이죠. 제가 느끼는 감정의 충만함이 그때와 지금 다르지 않은데 어찌 부끄러움을 말씀하시는지!
묻혀가는 것이 안타까워 감히 소개해 봅니다.
마을의 잔칫날, 한 사냥꾼이 마을에 도달합니다.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사냥꾼입니다. 하지만 사냥꾼은 자신의 빈손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냥꾼이 덤덤하게 말합니다.
“300년 간 한 마리도 못 잡고 있소.”
마을사람들은 그의 말을 농담으로 취급했지요.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잔칫날의 넉넉한 인심을 담아 그를 무리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붉은 까마귀와 흰 사슴을 쫓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건천인의 시절과, 수메산과, 수메산 정상에서 만난 천인들과, 그들이 내린 축복 또는 저주를.
산에서 줄달음쳐 내려온 그를 맞이한 세상의 종말과, 씨앗에서 태어난 오누이와, 오누이가 불러낸 사람- 곤천인의 시작을.
그리고 욕심과, 분노와, 저주와, 살육을.
오누이는 죽음을 맞이한 후 그들 이름대로의 짐승으로 변합니다. 신수(神獸)가 아닙니다. 악수(惡獸)이자 흉수(凶獸)입니다. 붉은 까마귀는 대지를 태우고, 흰 사슴은 모든 것을 얼려버립니다. 사냥꾼은 곤천인의 종말을 보았습니다. 감지인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냥꾼은 척박함 속에서 그들에게 생존을 가르치며 살다가, 자신의 수명의 이유를, 자신에게 내려진 축복과 저주의 이유를 깨닫고야 맙니다.
“그렇게 저는 남은 생을 이 고을에서 저 고을로 헤매어 다녔습니다. 큰 도시도 있었고 외따로 떨어진 산골의 작은 마을도 있었죠. 도적으로 오인 받아 쫓기기도 하고 백년 묵은 곰과 싸우기도 하고 천녀의 발자국이란 전설을 따라 온 산맥을 넘나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시도 제가 살아있는 목적을 잊어본 적은 없습니다.”
사냥꾼은 그 목적을 위해 활을 듭니다. 오로지 남겨진 단 하루를 살며.
그는 금의 화살을 쏘았습니다.
그는 은의 화살을 쏘았습니다.
우리들은 리지인의 자손입니다. 그가 하늘로 돌려보낸 오누이가 우리를 증거합니다. 지금도 붉은 까마귀가 찬연하게 서쪽을 향해 길게 꼬리를 끌며 날아가고 있군요. 저는 그 아래에서 햇살을 누리는 그저 미천한 자이기에, 감히 전해주신 이 옛 이야기를 좋다, 아니다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저 본능으로 좋다, 아니다 생각하며 눈을 감고 숨만 쉬다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그리겠지요.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먼 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면, 위대한 과거의 편린을 접한 충격으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제 심장이 터져나가는 소리일 겁니다. 저는 그저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