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서 마리 멜리에스가 떠올랐어요. 기억과 사랑과 관련된 이야기니까요. 물론 그것보다도 변형된 태세우스의 배 문제니까요.
섬세한 묘사가 정말로 맘에 들었습니다. 시각적으로 다양한 묘사가 나와 마치 몽환적으로 체색된 수체화를 보는 듯 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묘사 외에 이야기의 얼개에 대해선 솔직히 말하기 어렵네요. 저는 다른 곳에 꽂혀버렸고 이야기를 인간 영혼의 실존 보다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해석했으니까요.
다만 이런류의 이야기에서 채도를 높히는게 항상 좋지많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끝을 흐려서 긴 여운을 주는 방법도 있을 테니까요.
작가님의 의도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어려운데, 감각적 묘사를 시각으로 제한한 까닭을 잘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중간에 아직 지수의 이름을 듣기 전 귀앳말로 할 때 그녀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고 간단하게 서술하고 넘어가는데, 저는 여기서 숨결이나 감촉에 대한 묘사가 나올만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주인공이 감정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감각이 모호해 시각적 묘사만 나와서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작가님의 뚜렷한 의도가 아니라면 시각 외에도 다른 감각들에 대한 묘사를 쓰는 편이 나아 보입니다. 눈 외에도 피부나 코 밑을 간지르는 다양한 감각적 묘사가 큰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여기까지 쓰다가 갑자기 생각난 건데 이게 큰 복선인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감정이 박탈된 것과 감각의 마비가 같이 오는게 아니라 주인공의 정체 때문에 시각기관 외 다른 감각기가 미흡한 거라면 설명이 되지 않나 싶은데 그렇다고 한다면 섬세한 감각적 묘사를 하고 그것의 박탈감을 묘사하는 것으로 복선을 넣을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주인공은 기억을 잃어버렸고, 중간에 주치의에게 선행성 후행성 기억상실로 진단받았는데 도입부에서 담담하게 섬의 일상을 기술하는 부분을 보면서 기억이… 없나?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또한 전두엽이 감정을 관장하는 부분은 맞지만 감정을 포함한 고등 사고 과정을 담당하는 곳이고 기억과 정서를 다루는 곳은 측두엽이나 해마 부분이죠. 전두엽이 소실되었다면 평온하게 감정만이 손실된 상태 보다는 충동적이고 절제가 되지 않는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다만 이게 다른 독자들 모두가 가지는 공통적인 심상이라 보기는 어렵겠내요.
선행성 기억상실의 경우 해마의 손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고, 따라서 회복하는건 불가능 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반면 해리성 기억상실의 경우 일반적으로 매체에서 묘사되는 기억상실에 가까운, 회복 가능한 기억 상실이고요. 만약에 이게 해리성 기억상실로 제시되었다면 기억을 회복하려는 과정이 맥거핀이고 진실에 도착했을때 맥거핀을 잊어버릴수 있었을거 같아요. 그렇지만 이것만 봤을땐 주인공이 처한 처지가 이해가 안되고 진실을 접했을때 하지만 여전히 다른 가능성이 열려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주인공의 기억상실은 어디까지나 단순한 맥거핀에 지나지 않고, 주인공 자신이 지닌 진정한 문제를 깨닫는게 이야기의 큰 얼개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인공이 지닌 진정한 문제가 진단명이 잘못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까 이야기를 따라가기 보다는 이건 해리성 기억상실 내지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맥거핀을 집어던질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해석을 하니까 이게 태세우스의 배 문제의 응용 보다는 보다는 진단명을 잘못 내린 무능한 의사의 헤프닝으로 읽혀 버리네요. 외상적 기억을 받아들이지못하는 주인공이 방어 기제를 발휘해 조현병과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동시에 앓는다는 해석도 가능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