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과 주말출근이 일상이지만, 회사 일이 항상 바쁜 건 아니다.
주말에 영화 한 편 볼 여유가 생길 때면, 대단한 흥행작보다는 다소 마이너 하지만 독특한 감성이 녹아있는 작품을 찾아 시간을 음미하곤 한다.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라는 대만영화가 있다. 2010년 개봉한 영화로 한국에서는 2011년 7월에 개봉했다. 이름도 얼굴도 낯선 배우들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소소하지만 아름답다. 개봉 당시 한국 관객은 13,414명으로 과연 이 영화를 아는 한국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을 만큼 소소한 인지도를 갖고 있다.
서로 다른 두 자매가 카페를 창업하며 벌어지는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담긴 영화는 일상에 찌든 내게 향긋한 감성을 가득 부어주었다. 영화가 끝나고 감성 충만한 채로 영화의 정보를 찾아봤지만, 관련 정보가 많지는 않았다. 낯선 대만의 낯선 감독의 낯선 영화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나 보다.
그런데 어떤 평론가의 글귀가 내 마음에 꼭 와 닿았다. 누군가에게는 분명 인생영화가 될 영화. 취향이 맞는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한 명작이 없을 거라는 평론가의 이야기에 모니터 앞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사람도 얼마 없고 흥행도 크게 하지는 못했지만,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는 내게 2015년(개봉하고 한참 후에 봤다.) 그해의 영화, 2010년대를 통틀어도 베스트 영화 10개 중 하나에 꼽힐만한 영화였다.
에이켄 작가의 forgotten 리뷰를 쓰며 왜 장르도 분위기도 심지어는 소설도 아닌 영화이야기를 꺼내느냐면, 2020년이 불과 3일 남은 12월 말이되서야, 나의 올해 취향저격 장편을 찾았기 때문이다.
에이켄 작가의 forgotten 은 말하자면, 명작은 아니다. 걸작도 아니고, 수작도 아니다. 33편 총 분량 중에 진짜 재미는 중반인 16편이 되서야 올라오는 슬로우 스타터에, 짚고 넘어갈 단점도 한두 개가 아니다. 게다가 이 소설을 온전히 즐기려면 유사장르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단점들을 장르에 대한 애정으로 참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축하한다. 당신은 올해 잘한 일 리스트에 [에이켄 작가의 forgotten 을 읽은 것] 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무척이나 전형적인 학원 공간이동 호러물이다. 장르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우메즈 카즈오의 표류교실이 벌써 근 50년전 작품인 이 유서깊은 장르는 지금도 다양한 게임과 소설, 만화에서 소비되는 마이너 장르의 메이저라 할 있다.
방금 메이저라 표현하기는 했지만, 마이너는 마이너인지라,에이켄 작가의 forgotten 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다음 게임과 소설 정도는 접해 본 적이 있어야 한다. 코프스 파티, 화이트 데이, 아오오니,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 소설의 기본 플롯은 코프스 파티의 향취가 느껴진다. 학교 안의 이공간으로 이동한 학생들이 괴물을 피해 미스테리를 풀어낸다는 이야기는 코프스 파티류 게임의 전형이다.
하지만 에이켄 작가의 forgotten 은 여기에 장르적 비틀기를 한번 시도한다.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처럼 각 등장인물은 공포의 희생자로만 소비되지 않고 각자 역활과 사연을 부여받아 생명력 넘치는 열연을 펼친다. 여기에 분명 어디선가 본듯하지만 근래에는 자주 사용되지 않은 독특한 설정이 더해져(스포일러가 되니 밝힐 수 없는) 클리셰 덩어리지만, 그렇다고 뻔하지만은 않은 에이켄 월드가 만들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코프스 파티를 예시로 들 만큼 소설은 어둡고 음침하며 피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냥 가볍게 진입하기에는 분명 과속방지턱이 높은 소설이다. 하지만 마치 인디 호러 게임 실황을 소설로 풀어낸 것 같은 독특함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이런 류의 소설은 드물기도 하거니와, 이렇게 장르적 특성을 잘 살려낸 작품은 더더욱 없으니 분명 단숨에 마지막 편까지 읽어내리고 말 것이다. (내가 그랬다.)
아쉽게도, 에이켄 작가의 forgotten 은 장르 입문작으로는 적절치 않다. 이미 장르의 기본 문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을 바탕에 깔아두고 그 위에 소설을 쌓아올려, 코프스 파티나 아오오니 같은 게임을 해보지 않았다면,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란 소설을 오늘 처음 들어본다면, 에이켄 작가의 forgotten 의 세계를 탐험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시라도 흥미가 생긴다면 꼭 16편까지는 읽어보길 바란다. 그때를 기점으로 소설은 그동안 깔아둔 복선을 하나둘 회수하며 읽는 이를 거침없이 몰아세운다.
에이켄 작가가 미리 써놓은 작품이 많아 다행이다. 덕분에 이번 연말, 연초는 그야말로 취향작 넘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리뷰를 쓰기 전 단편 [매일 밤, 죽은 애인이 찾아와요.]를 읽었는데 역시나 취향저격 제대로다.) forgotten 의 세계가 계속 이어지길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