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는 『별리낙원』 115회까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이연인 작가의 소설 『별리낙원』은 제목부터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별’이 있다면 ‘낙원’이 될 수 없음에도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끊임없이 행복을 반추한다. 아슬아슬한 정쟁의 한가운데에 놓인 두 인물의 사랑을 목도한다. 어쩌면 이루어질 수 없음에도, 그 끝이 이별일지라도 끝내는 낙원이어라는 바람을 안으며 소설의 문장을 매만질 때마다, 작가가 이 세계와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이인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대단한 설정의 방대함과 헤아릴 수 없이 넓은 세계관에서, 자칫 무너지면 그 틈이 훤히 보이지 않을까 싶은 촘촘한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의 능력에 소설 읽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투명한 유리일수록 먼지는 잘 보이고 깨끗한 옥일수록 그에 묻은 티가 선명한 법이다. 그러나 『별리낙원』에는 깔끔하게 떨어지는 하나의 이어짐이 있을 뿐, 티끌이나 먼지가 보이지 않는다. 완벽한 소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으나 이 소설을 읽으며 어렴풋이 ‘완벽’의 형태를 경험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소설을 읽고 한동안 무슨 생각을 적어야 할지 몰랐다. 내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이 작품은 도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온 것인지. 그저 작가의 능력에 한동안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감상을 쓰자면 줄곧 찬양이 나올 줄 알면서도, 나는 이 소설을 사랑하게 된 이유나 진하게 밝혀볼 요량으로 이렇게 감상을 쓴다.
방대함 속에서 드러나는 섬세함
이연인 작가는 넓은 세계관과 촘촘한 문체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룬다. 이는 작품의 흐름이 정확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머물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하나의 나라에 대해, 그리고 그 이방에 대해 놀랍도록 넓은 세계를 소설 안에서 읽을 수 있다. 관직과 사회상, 귀족의 문화와 범인의 생활에 두루 통달한 신적 존재가 그 내막을 실제로 보고 치밀히 서술하는 것처럼, 어느 하나도 어긋나거나 벗어나는 일이 없다. 처음 이 소설이 가상의 국가 간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와 왕족 간의 미묘한 관계에 대해 다룬다는 설정을 보고 나는 이 방대한 세계와 사회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작가의 문체는 대단히 치밀하다. 비유하자면, 바늘 하나 들어갈 공간 없이 빽빽하게 짠 하나의 두꺼운 목도리를 그 끝에서부터 한 코 한 코 파헤치는 느낌이 든다. 그런 문장을 읽자면 으레 피곤하기 마련이지만, 앞서 이야기한 광활한 세계관과 그곳에 놓인 인물의 이야기가 독자들의 숨통을 트이게 한다. 조밀하게 이어지는 묘사를 따라가면 우리는 어느새 소설의 나아감에 몸을 싣고 흠뻑 그 안에 빠진다. 오히려 문장의 치밀함이 읽는 사람의 다음 걸음을 안내하는 인도자로서 기능한다. 이건 작가가 가진 특유의 매력이며, 분명히 독자들이 이 소설에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별리낙원』의 가장 독특한 점은 매 회차의 끝에 전혀 의도적 긴장감을 조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자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연재물의 특징이라고 보아도 되는 마무리의 긴장감은 많은 소설에서 독자의 지속적인 유입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다. 하지만 『별리낙원』에는 전혀 다음 작품에 대한 암시나 극적인 마무리가 등장하지 않는다. 자극적인 마무리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는 맺음이다. 어떤 장치나 도구도 없이, 작품의 이어짐 자체가 온전히 작용해 독자를 다음 회차로 이끌어 들이는 방식은 『별리낙원』의 내용 자체에 단단한 힘이 실려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인물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와 장면에 대한 치밀한 묘사가 무의식 가운데에 다음 회차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는 것이다.
소설의 공간이 어떠한 크기를 갖든, 작품의 문체가 어떠하든, 그것은 작가의 자유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균형을 계산해 독자가 읽기에 매끄럽다고 느끼는 지점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이연인 작가는 자신에게 꼭 맞는 문체가 무엇인지 찾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이미 자유롭게 구사한다. 또한, 독자들의 기대에 매 회차 부응하며 연재물의 긴 진행 속에도 그 긴장과 이어짐의 강약을 전혀 흩뜨리지 않는다.
화끈한 황녀와 조신한 남편
『별리낙원』의 또 다른 매력은 기존 관습의 전복이다. 단순히 성별과 지위에 대한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과거의 역사 소설에서 무심히 다루어지던 사소한 것에서부터 모든 분야에 걸친 변화를 주었다. 예를 들면 여덟 황녀와 그들의 남편에 대한 호칭이 있겠다. 일반의 역사에서 우리는 왕과 ‘왕비’라는 단어를 익히 들어왔다. 왕(王)의 아내(妃)라는 뜻으로 여성에게 일종의 속박을 일상적으로 부여했던 이 호칭이 『별리낙원』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여덟 황녀는 모두 ‘친왕’으로, 그리고 그들의 남편은 ‘왕공’으로 불린다. 남성에게 소속을 부여한 이 사소한 호칭의 전환은 소설에 낯섦을 입히는 동시에 독자의 시선에 변화를 일으킨다.
등장인물 중 선우의 성격은 조신하다. 여전히 ‘조신하다’가 ‘여성 명사에 붙는 불규칙 형용사’라고 설명된 사전이 존재하는 만큼 ‘조신’은 상당히 성차별적으로 쓰이던 단어였다. 선우는 이전에 여성에게 강요되던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연인 작가는 이처럼 성 역할을 고정적으로 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성의 특징을 여성에게 온전히 부여하지도, 여성의 특징을 남성에게 온전히 부여하지도 않는다. 『별리낙원』에 등장하는 이들은 어떤 성별을 가지든 자신만의 역할과 지위를 독립적으로 갖는다.
“좋은 남편이라면 모름지기 지켜야 할 첫째가는 덕목이 다름아닌 순명인데” – 54회
“언니도 명심하세요. 남자들이란 귀엽다 예쁘다 하고 마냥 풀어주기만 하면 어느 틈에 정수리까지 기어오르려 든다니까요.” – 72회
“지나치게 똑똑한 남자는 아무래도 다루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 83회
이상의 구절은 본래 여성에게 차별적인 언사로 사용되던 표현이었다. 작가는 이 신랄한 말투를 소설에 고스란히 반영한다. 하지만 그 날카로운 끝은 남성 인물을 향해 있다. 이 역시 기존 여성을 향하던 표현들이 남성을 향해 사용될 때 주는 느낌을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인다. ‘미인’ 같은 단어 역시 선우를 종종 가리키는 표현이며 아름다움을 간직한 남성이라는 그의 외모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이처럼 『별리낙원』에 드러나는 다양한 언어적 시도는 인물 개인의 정체성을 확고히 만들며 어딘가에 갇히지 않은, 스스로 존재하는 이들이 소설 안에서 마음껏 길을 가도록 한다. 작가의 정돈된 문체는 각 인물의 특징을 고스란히 실어 그들이 걷는 길을 단단히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며, 작중 의도를 독자들에게 명확히 전달하는 매개가 될 것이다.
사미르와 선우, 대한과 진원
이 소설은 장치와 문장을 다루는 작가의 기술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작중 인물과 그 역할을 균형 있게 분배한 작품이기도 하다. 대한국과 사미르는 대단한 문화의 차이를 가진 나라다. 믿는 신과 복식, 종교의 형태 역시 조금씩 다르다. 역사 소설에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계약 결혼은 종종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진원과 선우이기에 『별리낙원』은 여타의 작품들과 다른 길을 걷는다.
대한과 사미르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데에 일조한 것은 여덟 황녀의 존재다. 제국의 황녀가 여덟이나 되며 그들 각각이 정치적 신경전을 벌인다면 독자로서는 얼마나 흥미로운 일일까. 그리고 그 중심에는 2황녀 진원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진원의 첫 등장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운, 경제적으로 부유한 진원의 거침없는 캐릭터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의 앞에는 가림이 없다. 무언가의 방해나 거리낌 없이 나아갈 수 있는 인물은 호쾌하며 독자들의 마음에 시원함을 준다. 그런 그에게 ‘선우’라는 남편의 존재는 성격의 균형을 맞추기에 탁월했다.
화신 교단의 성직자이자 타고난 성품이 부드러운 선우는 진원의 불같은 성격을 다스리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비록 서로의 마음이 온전히 맞아 결혼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둘 사이에 미묘한 감정의 싹이 생겼다는 것은 작품을 읽는다면 누구든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미르와 대한의 화친을 위해, 정치적인 목적으로 시작한 것처럼 보이는 둘의 관계는 어느 순간부터 낙원의 한 조각처럼 따스해진다. 비록 위태로운 순간도 있지만, 선우와 진원은 이별하더라도 그 순간까지는 낙원에 있는 이들과 다를 바 없다.
정치적 견제와 계약 사이에 낙원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문득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낙원이란 본디 그 경계와 정의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나는 대한과 사미르의 거대한 간극 사이에서도, 일국의 왕과 타국의 신관 사이에 피어오르는 감정의 한 조각을 느낀다. 많은 분량의 진행을 이루었지만 늘 새로운 마음으로 읽히는 소설 속에서 선우와 진원의 관계, 그리고 인물이 얽힌 모양들이 변해가는 과정을 따르는 일이 나에게는 낙(樂)이다.
가끔 내가 읽는 곳이, 그리고 있는 곳이 소설의 도입부인지, 중간부인지, 후반부인지 궁금할 때가 있다. 유독 『별리낙원』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자주 들었다. 알아간 것보다 알아갈 것이 더 많은 이 작품에서 나는 어느 지점에 도달했을까. 하지만 일단 소설에 집중하기만 하면 그런 생각과 궁금증은 이내 사라진다. 어느새 나는 선우와 진원이 도달할 낙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어떤 확신을 갖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저 홀린 듯 새로운 회차를 읽는다. 이 끝에 작가가 무엇을 두었는지 의심하지 않으려 한다.
작가의 문장을 믿고, 이 작품의 전개를 믿고, 인물들을 믿고, 제목을 믿는다.
설령 내가 당면할 그것이 ‘이별’의 형태를 하고 있더라도, ‘낙원’ 역시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