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할 수는 없어도 책임지기 위해 감상

대상작품: 구미호 보호시설 (작가: 노르바, 작품정보)
리뷰어: cosy, 2시간 전, 조회 8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은 대체로 따듯하거나, 반전이 있거나, 개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작가 코멘트에 써 있듯이, 중학교 때 습작으로 구상했던 것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따뜻하지도 안락하지도 반전이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처참하고 불편한 질문만이 있고, 심지어 거기에 정답도 없습니다.

이 소설은 전설 속의 신비로운 존재인 ‘구미호’가 아니라, 기발하게도, ‘실제로 9개의 꼬리를 달고 태어난 기형 여우’들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세상에 그런 여우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으니 장르는 SF지만, “산 중턱, 서울에서 세 시간을 달려가야 닿는 곳에 숨은 듯 자리한 시설. 안내판조차 희미한 마치 ‘잊히길 바라는 것 같은’ 공간”에, 어쩌면 정말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여우들이 간간히 발생하고 있고, 그런 여우들을 구조해서 보호하는 시설이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소설은 전설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대화 합니다.

“사람들은 구미호를 보면 신비롭다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죠. 전설이 만들어 낸 환상 때문에요”

이 말처럼, 이 소설은 우리 사회가 불편한 현실을 신화와 낭만으로 포장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구미호 보호시설이 산 중턱 깊숙이 숨어있고, 사람들로부터 의도적으로 폐쇄되어 있다는 설정 또한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사회의 주변부로 밀어내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기형 구미호들은 야생에서는 버려지고, 구조되어서는 갇히고, 대신 보호받지만 인간이 고통을 없애주지는 못합니다. 이 소설은 이들의 존재를 통해 우리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 존재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장애인, 노인, 빈곤층 등 사회가 ‘정상’의 범주 밖으로 규정하고 외면하는 이들의 모습이 기형 구미호들의 처지와 겹쳐보입니다. 김주영의 말처럼, 사회는 그들에게 적응하라고 말하지만 정작 사회는 그들을 위해 변하려하지 않으니까요.

칠성이가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려다 넘어지는 장면, 이름 없는 녀석이 3년 내내 같은 자리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은 단순한 불행을 넘어섭니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삶 자체가 고통인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사회는 이런 존재들은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신비롭지도, 아름답지도, 쓸모있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김주영 연구원은 구미호들을 구조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습니다. “이게 옳은 일인가?” 구조가 옳을까요, 자연에 맡기는 것이 옳을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눈 앞에 고통받는 존재를 외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김주영도 “할 수밖에 없죠. 신고가 들어오면 모른 척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이 소설은 질문을 던집니다. 모든 생명은 평등한가? 고통스러운 삶도 사는 것이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 개입해야 하고 언제 물러서야 하는가? 누가 그것을 판단할 권리가 있는가?
이건 굳이 동물이 아니더라도, 우리들 스스로도 자주 던지는 질문입니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도 사는 게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건 안락사 문제와도 연관됩니다. 그럼 우리는 언제 타인에게 개입해야 되고 언제 물러서야 할까요? 누가 그걸 판단해야 될까요? 본인? 의사? 법?

소설 속에서 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불편한 질문이더라도 외면하지 않고 함께 고민하고 불완전한 답이라도 행동에 옮기다보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이들을 구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함께 있어줄 수는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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