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연 작가의 소설은 끝없이 신비하다. 작품 자체의 분위기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설정과 문장이 조화롭고 치밀한 전개와 암시가 독자를 끝까지 몰고 간다. 하나의 문장으로 소설 전체의 이미지를 뒤집어버리거나 예측을 또 다른 예언으로 바꾸기도 한다. 내가 걷던 길을 기분 좋게 틀어버린 어떤 순간에도 ‘반전’을 맛보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도착해 있다.
이름과 모습이 비슷한 두 존재에 대한 소설은 이전에도 무수하게 존재했으나, 번연 작가의 작품은 그럼에도 새롭다. 이전의 것들과 같은 결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복제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가도 사랑을 말하며, 연금술사가 등장했다가 죽어가는 인간들이 보이는 이 단편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두 목소리의 호명이 있다.
야옹, 마리에.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복제나 클론을 다루는 줄로만 알았다. 제목처럼 마리에와 마리에가 나오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사실 두 번째 읽을 때까지도 전혀 몰랐다. 심지어 쾰이 고양이인 것을 알고도, 연금술사가 고양이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에 경악하면서도. 복선과 반전을 모두 보았으면서 마리에의 정체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 읽으면서 쾰의 말을 알아들은 인물이 소설에 하나 더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리에. 마리에는 고양이였다.
연금술사가 마리에와 비슷한 다른 마리에를 만들었다는 부분을 읽으며 복제 인간이나 오토마톤, 영혼이 들어간 인형 등을 상상했다. 지나치게 멀리 갔다가 되돌아온 곳에는 호박색 눈을 가진, 흰 고양이가 한 마리 앉아 있을 뿐이었다.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소설에서 ‘말’을 하는 주체를 인간이 아닌 동물로 설정한 것만으로, 그것을 작품의 끝까지 치밀하게 숨겨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웠다.
음. 사실 소설이 치밀했다는 것과 함께 내가 여러 힌트에 예민하지 못했다. 마리에와 쾰의 정체를 파악하고 소설을 다시 읽으니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둘은 처음부터 고양이였다. “귀밑털”이 곤두서는 쾰을 보고 단번에 인간이 아닐 것이라는 예상을 했지만, 마리에는 당연히 주인공이니까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람’과 닮은 존재는 당연히 사람뿐일 것이라는 편협한 생각이 더 넓은 범위의 상상을 가로막았다. 당연히, 고양이와 사람은 닮을 수 있음에도.
“뭐야. 한스(Hans)랑 한스 씨(Herr.Hans)랑 둘 다 왔잖아?”
이 문장은 소설 안에서 고양이와 인간 사이에 일종의 교환 관계가 성립함을 암시하고 있다. “한스”와 “한스 씨”는 이름만 같고 한 명은 인간, 한 명은 고양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고양이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꽤 재미있었다. 하나 더, <마리에, 마리에>가 고양이의 목소리로 진행되기 때문에 소설 안에는 인간과 고양이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의 어긋남이 있다. 고양이 쾰은 작품이 끝나기 직전까지 하늘을 ‘푸른 위’라고 부른다. 이런 어휘의 사용은 인간과 고양이를 대비시킨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고양이만의 세계를 구축하기도 한다.
이 부분이 좀 더 매력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보았다. 첫째로, ‘고양이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 사이에 작가가 만든 틈이 약간 많이 벌어졌으면 한다. 물론 작가는 쾰과 마리에의 정체를 숨기느라 조심스럽게, 적은 단어에 차이를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밀도가 독자들의 의심을 가렸다. ‘파란 위’라는 말은 쾰의 정체에 어떤 의심의 요소로도 작용하지 못했다. 오히려 효과적으로 쾰의 ‘고양이성’을 드러냈다. 작가가 만들 수 있는 더 많은 ‘고양이 말’을 듣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결말부를 포함한 소설 전체의 색이 선명히 살아나지 않을까 싶다.
고양이는 인간에게 늘 비범한 존재였다. 고양이를 신과 인간의 매개로 생각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다. 감상의 서두에서 말했듯, 이 소설은 신비하므로, 고양이와 잘 어울릴 수밖에 없다. 마리에와 쾰의 캐릭터는 꼭 맞는 퍼즐처럼 소설의 안쪽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작품 안에서 일종의 버튼처럼 기능한다.
이 버튼을 누르는 순간부터 소설을 읽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연금술사가 하나 살았어요.
고양이 이야기를 충분히 했으니 연금술사에 대해서도 말해보자. 연금술사는 “인간성을 벗어던진” 존재다. 그랬기에 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으며, 쾰과 마리에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 수 있었다. 연금술사의 존재는 하나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그 숲속엔 마녀가 살아.
아니, 그 숲속엔 괴물이 살아.
아니, 그 숲속엔 – 인간을 떠난 자가 산다던데?
마녀-괴물-연금술사로 이어지는 하나의 고리는 ‘인간성’을 벗어던진 이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표현했을까. 그 전에, ‘인간성’의 본질은 무엇일까. ‘인간성’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의 본성.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번연 작가는 인간의 본성을 ‘필멸’로 설정했다. 최근 논의되는 ‘인간성’의 담론이란 인간과 ‘무생물’, 인간과 ‘기계’ 등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성을 벗어던진 존재’의 비교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여기에는 온전히 인간만 존재한다. 인간과 다른 대상의 비교로서가 아니라 온전히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뽑아내야 하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마리에, 마리에>에서 인간은 ‘필멸’한다. 그것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다.
‘필멸’은 생물과 생물이 아닌 것들에게 모두 적용되는 속성이다. 세상에 사는 한,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존재’는 사라진다. 불멸하는 모든 것은 ‘신’이라 불렸다. 수많은 신화 속에서 전능하다는 신도 ‘인간’의 몸을 입으면 ‘죽음’이라는 이름의 소멸을 겪어야 했다. 그러니 어쩌면, 멸(滅)이야말로 분명히, 인간이 오랜 시간 숭배해 온 인간성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다면 연금술사는 불멸하기에 인간이 아니다.
사람은 ‘불멸’에 대한 상상력이 적다. 살면서 겪어본 적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멸망’을 늦추는 방식으로, 또는 사라질 것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방식으로 살아왔다. 생식과 번식 역시 ‘연장’할 수 없는 생명을 ‘연속’시키려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는가. 흥미롭게도 연금술사는 소설의 결말에서 ‘혼합’의 방식으로 불멸을 창조한다. 인간은 그에 대해 마녀-괴물-연금술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셋은 모두 필멸하는 자들이지만, 인간은 ‘불멸’을 경험할 수 없기에, 가장 신비로운 필멸의 존재들로 ‘신’을 호명했다. 이것이 연금술사에게서 느껴지는 최소한의 기운이므로.
<마리에, 마리에>에서 연금술사는 총 두 개의 단어로 표현된다. 의술의 뿌리가 되는 ‘Spagyriker’와 화학의 뿌리가 되는 ‘Goldmacher’이다. 연금술사가 ‘의술’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은 몹시도 흥미롭다. 둘은 아주 먼 개념 같다가도 소설을 다 읽는 순간 비로소 연결이 된다. ‘의술’로서의 연금술을 사용해 연금술사는 쾰과 마리에를 혼합한다. 그리고 불멸의 존재로 만든다. 자신과 같은 연금술사로. 어쩌면 연금술사는 다른 연금술사로부터 ‘만들어진’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연금술사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산다. 그리고 우연히 마리에라는 여성과 마주한다. 그녀가 키우는 고양이를 데려올 만큼, 그는 마리에에게 집착한다. 고양이 마리에에게 새로운 친구이자 탈출구가 나타나기가지는 오랜 시간이 흐른다. 오랜 날이 흘러 마리에에게는 친구이자 탈출구가 나타났다. 그 까만 고양이의 이름은 쾰이다.
마리에, 제발 달아나
마리에의 곁에 쾰이 있다는 것을 연금술사가 깨닫는 순간이 소설의 변곡점이다. 동시에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마리에/제 발/달아나’라는 말을 사각형으로 배치한 작가의 재치가 돋보인다. 형식상의 실험을 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마리에 제발 달아나’라는 문구를 반복해서 빙글빙글 돌리거나 주술처럼 길게 이어지는 문장을 뱅글뱅글 돌려 표현했어도 재미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장면 이후, 마리에와 쾰은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된다’는 말은 결합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설과 만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두 존재의 결합을 접할 수 있다. 이 소설의 마무리는 이산화 작가의 작품 「희박한 환각」의 결말과 만화 『재봉사의 공방』에 등장하는 인형술사, 그리고 장의사 마스터피스를 떠올리게 한다. 「희박한 환각」은 인간과 해양생물의 사랑을 다룬다. 종과 종을 넘어선 감정을 그렸다는 것이 이 작품과 다르지만, 이 소설에서 두 존재가 한 몸이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다만, 둘의 결합은 ‘흡수’로 나타난다. 해양생물인 루시가 주인공 빅터 리어리를 체내에 흡수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합쳐짐’에 있어 둘의 위치가 동등하지는 않다. 그렇기에 다른 만화의 ‘인형술사’라는 직업이 동시에 떠오른 것이다.
『재봉사의 공방』에서 인형술사는 인형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존재로 나온다. 그리고 악의 조직 제노스의 보스인 장의사 마스터피스1 ‘갓 엠버’는 자신의 딸을 살려내기 위해 인간의 시체를 모은다. 시체를 기워낸 그의 딸은 귀엽지만 어딘지 기괴한 느낌을 준다. 갓 엠버는 <마리에, 마리에> 속의 연금술사와 비슷한 능력이 있기도 하고, 신체를 이용해 새로운 ‘창조’를 할 수 있으며, ‘불멸’을 좇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에 놓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갓 엠버는 ‘기워냄’으로 끊임없이 딸의 부활에 탐닉한다.
<마리에, 마리에>의 연금술사는 이들보다 조금 더 ‘신’에 가깝다. 그는 ‘흡수’가 아닌 동등한 위치의 결합을 이루어내며, ‘기워냄’이 아니라 진정한 혼합을 보여준다. 그는 마리에와 쾰을 한 몸으로 만들었고, 그들에게 불멸의 속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아마, 자신과 인간 마리에 역시 한 몸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그의 집이 전부 타버려서 알 수는 없지만, 인간 마리에의 실종은 필연히 연금술사와 관련이 있을 테다.
쾰은 “검은 몸에, 호박색 눈”, 또는 “흰 몸에, 새파란 눈”을 가진 고양이가 된다. 마리에가 도망치길 바랐지만, ‘마리에와’ 도망쳤다. “나는 쾰이고, 또한 마리에야.”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고양이로서의 ‘신’이 되었으며 ‘완전’하고 불멸한다.
번연 작가의 글은 치밀함에서 오는 매력이 있다. 그는 앞과 뒤의 복선을 통해 독자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는 이야기를 쓸 줄 안다. 이 작품을 통해, 언어와 언어의 연결고리가 주는 미묘한 감각을 작가가 충실히 뽑아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장면과 장면을 촘촘히 기워낸 한 판의 지도 속에서 인물과 동물, 신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환상을 느꼈다. 그가 창조한 세계에서 외롭지 않은 고양이를 보았다.
걷는 자의 걸음을 멈추고, 살아있는 자의 숨쉬기를 그치게 하는 연금술사는 어쩌면 작가가 될 수도 있다. 창조주와 작가는 아주 다르지 않다는 작은 생각에서, 나는 번연 작가에게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로 했다. ‘연금술사’라니. 내가 본 그의 첫 소설과 아주 잘 어울리는 단어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오늘 창조주를 한 명 알게 된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