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릿G에 등록된 배명은 작가의 소설 <아까시나무>에는 해시 태그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다. ‘#변태’, 그리고 ‘#부활’. 주인공 단화의 남편과 시어머니는 변태적 성향을 지닌 인물들이다. 이들은 단화를 물리적, 정신적으로 가해하며 살아가고, 또한 서로의 변태성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변태는 혼자 살아남지 못한다. 가학적 성향을 받아낼 희생자를 필요로 한다.
죽은 아들을 살리겠다는 시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산속으로 들어간 단화. 시어머니는 제 아들의 지난 변태적 삶이 남긴 흔적을 나무에 박아넣는다. 그리하여 변태는 나무의 양기를 빨아먹고 부활을 준비한다. 나무에 매달린 고치를 뚫고 벌레처럼 기어 나온 그 변태는 자신을 낳은 이의 기운과 그가 차린 음식들을 탐욕스럽게 먹으며 생존한다. 벌레의 몸을 하고 태어난 벌레는 고치에서 잠잠히 시간을 버틴 끝에 제 몸에서 나온 분비물을 뜯어먹고 성체로 변태에 성공한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갖고 태어난 벌레는 타자의 피고름을 빨아 먹으며 결코 성체로 변화하지 못한다. 변태는, 변태하지 못한다.
변태적 인물이 미치는 악영향은 크고도 깊다. 두 변태에게 시달리는 현실 속에서 단화는 자신을 지키는 힘을 잃고 그들의 변태적 행위에 익숙하게 순응해왔다. 어느 순간까지는.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의 손으로 이미 죽은 나무의 흔적을 태우는 주도적 행위를 통해 변태의 부활을 막고, 고작 한 줄에 불과하면서 그리도 발을 꽁꽁 묶던 경계선을 넘어선다. 단화의 변태는 한 인간으로의 성취이면서 동시에 악의 순환을 끊는 결연한 변태다. 더 많은 단화들이, 비기 하나씩을 꼭 끌어안고 변태의 곁에서 벗어나기를. 그렇게 변태하기를. 그 순간에 불타는 풍경은 소금기둥처럼 뒤돌아보지도 말기를. 그래서 아까시나무만큼이나 흔한 변태들의 부활을 단호히 막기를. 오늘도 환경오염에 일조하고마는 연약한 마음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