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시작부터 수월하게 읽힙니다. 매야도라는 섬에서 과거에 발생했던 사건으로 자연스럽게 유진의 회상으로 유도됩니다.
집단의 광기가 소수에게 힘으로 작용할 때 이것 또한 왕따 현상과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수적으로 강제하여 싫다는 이에게 먹도록 강권하는 행태는 괴롭힘과 근본적인 면에서 같습니다.
싫다는 걸 강권하는 게 이제는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되었지만 지금도 어느 회식 자리에선 악습처럼 반복되고 있는 술자리 문화일지 모릅니다.
그것을 먹고 난 할머니들의 행동은 눈에 띄게 보기 싫을 지경으로 나타납니다. 벌거벗고 해안가에 드러눕는 행동은 수치심과 도덕적인 관념까지 벗겨버립니다.
사람의 도덕심과 수치심이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위선이라고 깎아 내린다 해도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삼는 문화의 하나인 건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할머니들이 그것에 쉽게 도취된 원인을 따져 보고 싶습니다. 할머니들에게 부과된 농사와 물질로 이어지는 과도한 노동력 부과.
희한하게 이 힘든 노동력의 대상에서 같은 고통을 부담해야 할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에 취해 버리는 대상도 할머니들에 국한됩니다.
한편 무섭고 징그럽게 생긴 외양에도 불구하고 먹을 것으로 선택되는 계기는 호기심이라는 충동입니다.
판도라의 상자는 항상 인간의 호기심을 경고했는데 호기심이라는 것은 인간의 미래를 우주에게도 기대볼 수 있도록 관심을 확장시키는 긍정적인 역할도 하지만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늘을 날고 우주를 들여다보게 하는 비행기와 천체망원경도 발명하게 해줬지만 일시에 인간의 역사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치닫게 할지도 모릅니다.
호기심으로 담배나 술과 마약에 손대면 자신의 건강뿐 아니라 사회를 병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조절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것도 없고 인간의 자제력만큼 자신할 수 없고 아슬아슬한 것도 없습니다.
공익광고 같은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갔는데 마지막으로 그것의 이름에 주목해 봤습니다.
바다에서 왔다는 것과 ‘해꽃이’라는 이름은 발음상 ‘해코지하다’라는 행위를 연상시킵니다.
실제로 그것은 소설 속에서 딱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2년 후에 방출시키겠다는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는 뉴스가 떠오릅니다.
방사능 물질인 트리튬이 남아있어 후쿠시마 지역 어민들도 반대하고 자국 내 여론도 반대한다는데 일본 정부는 무슨 의도일까요?
주변국가인 한국과 중국까지도 해치겠다는 의도로 해석하면 과잉해석일까요?
일본이 방사능 유출로 오염시킬 해양 생물이 소설 속의 해꽃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피해를 줄 것 같진 않습니다.
조만간 해물 종류는 식탁 위에서 사라질 지도 모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어떤 돌연변이 생물이 생태계에 나타날지 상상도 못하겠습니다.
해꽃이가 매야도 할머니들을 실종시키고도 다시 출현하듯이 우리 사회에 피해를 주는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몰라 걱정만 커집니다.
아무래도 걱정인형이라도 한 개 사와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참 태연히 사는 낙천적인 인간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