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을 한 번 휙 둘러보게 된다. 벽지의 색이 바랬다거나 찢어진 부분은 없는지 찾아보고, 괜히 화장실로 달려가 타일 사이에 작게 금이 간 부분이 있는지도 찾아본다. 평소 아무렇지 않게 있던 것이 괜스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다가, 설마!?, 혹시나!?, 진짜?! 등등의 감정 변화와 함께 갑자기 온몸에 찾아드는 서늘함을 느끼게 된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은 듯 스쳐지나가고, 어쩌다 눈에 띄기라도 하면 그저 지저분해서 보기 싫은 정도로만 여겨졌던 것들이 갑자기 처음 보는 것 마냥 낯설게 보인다. 그곳에서 뭔가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면, 아마도 이런 행동은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평소 흔하게 주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갑자기 낯설게 될 때, 그 공포는 배가 된다. 그렇게 평범한 일상을 낯설고 무섭게 바꿔 놓으며 <모두 정화되기까지>는 시작된다. 누구나 흔하게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일상이라는 이름에서 바로 가지고 와서는 공포라는 이름으로 채색한 뒤 툭! 하고 독자들 앞에 던져 놓는 것이다.
‘나’는 벽에서 기어 나오려고 하는 그 뭔가를 보게 된다. 그저 악몽이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처음도 아니었기에 그럴 수조차 없었다. 벽지의 지저분한 부분이나 타일의 금이 간 부분을 통해서 자꾸만 뭔가가 나오려고 한다. 신기하게도 깨끗한 곳을 통해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지저분하고 어딘가 균열이 간 부분만을 통해서 그것이 나오려고 한다. 두려움에 몸이 떨린다. 단순히 오래된 벽지나 욕실의 타일과 같은 곳에만 그 더러움이나 균열이 존재하지만은 않기에 더더욱 두렵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더럽고 균열이 가있으니까 말이다.
보통의 사람에게는 가장 따뜻하고 편안해야 할 집이라는 공간이, ‘나’에게 있어서는 완전 반대의 느낌을 던져준다. 집안에서 절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며 폭력으로 가족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짓밟는 아버지와 순종적이고 얌전하지만 애정에 굶주려 또 다른 남자들을 만나러 다니는 어머니. 집안의 여자들 중 유일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알기에 충분히 반항적일 수밖에 없는 동생과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나’. 이 네 명이 존재하는 공간은 보통의 평범한 가정은커녕 더러운 세상의 축소판에 불과했다. 그저 모든 것이 지저분하고 더러워 보이는 ‘나’는, 결국에는 모두에게 무관심하게 그저 관찰자로, 방관자로 남고 싶은 마음뿐이다.
‘내’ 주위를 비롯한 세상 많은 것들이 그저 더럽다고만 여겨졌지만, 그저 관찰하고 방관하면서 견딜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믿었던 사람에게서 -단순히 믿음 정도가 아니라, 삶 자체를 유지하게끔 붙잡아주던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로 결국 ‘나’는 세상 모든 것을 비롯해 ‘나’ 스스로까지도 더러움 그 자체로 만들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계속해서 나오려고 하는 그것’이 더럽거나 균열이 간 부분을 통해서만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꿔 말하자면 깨끗해야만 뭔지 모를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런 깨끗함은 조금씩 사라지기 마련이고 결국에는 -‘내’가 받은 상처를 통해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듯이- 세상 모든 것이 더러워졌기에 이제는 정화 작용이 필요하다는 일련의 순서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된다. ‘나’의 삶이 무너지면서 ‘나’의 생각들이 고스란히 현실에 투영되어 모두가 정화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그 폭력에 길들여져 있으면서 또 다른 남자를 갈구하는 어머니. 그리고 -얼핏 얘기했지만 아마도 선미가 이야기한 ‘이미 일어났다는 일’은 자신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닐까싶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 결과로 추측해서…- 피해자의 상처 입은 마음이 만들어냈을 법한 생각, 즉 스스로가 더러워졌다고, 혹은 이미 자신의 삶에 균열이 났다고 여기고 있던 선미. 그리고 이미 많은 더러움에서 오염되고 결국 자신의 삶이 모두 부셔져버린 ‘나’까지. 자의든 타의든 결국에는 정화가 필요했기에 ‘그것’을 불러낸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을 해본다. 타인의 시선에서든 자신의 관점에서든 결론적으로는 정화되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 대상이 확대되어 결국 세상 모든 것이 정화되어야만 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먹어 치워버리고 싶다는 많은 이들의 생각이 하나로 모아져 소설 속 현실에서 ‘그것’이 태어나게끔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진짜 현실에서도 원하지만 가능하지 않은 일들을 대신해서 말이다.
개인적으로 순전히 공포만을 위한 공포는 좋아하지 않는다. 공포라도 기왕이면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이 더 좋다. <모두 정화되기까지>는 그런 나의 취향과 잘 닿아있다고 생각된다. 단순히 뭔가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가만히 있는 사람을 공격해 새로운 모습으로 바꿔놓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더러움이나 균열이라는 문제의 시작을 통해서 모든 것이 정화되어야한다는 해결책(?!)으로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것은 단순한 공포이상의 의미까지 담겨있으니 더 좋게만 느껴진다. 더군다나 -앞서 언급했듯이- 주위 흔한 것들에서 공포를 가지고 오는 것은 독자들을 더 쉽게 이야기에 빠질 수도 있도록 하는 힘이 되는데, 그 힘을 잘 지니고 있다가 마지막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까지 힘껏 던지면서 마무리는 짓는 모습은 훌륭하게 느껴진다.
좀 더 어릴 적에는 이놈의 더러운 세상을 싹 갈아엎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지금은 그래도 몇 살 더 먹었다고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이란 사실을 알고 있어 조금 서글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일어나지 않을 법은 없다. 우리 주변에는 더러운 벽지가 있고 균열이 난 타일이 가득하니까. 그곳에서 뭔가 기어 나오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괴물 같은 것에 잡아먹히기보다 우리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정화의 힘을 한 번쯤은 더 믿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의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서 더더욱 그 힘을 믿어보게 된다. 그 믿음의 끝에 우리 모두가 스스로 정화되는 순간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