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를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이 이야기를 출간할 편집자의 마음이 되어 스크롤을 내려갔다. 나는 원래부터 글을 읽을 때는 좀 그런 요상한 습관이 있기는 하지만, 톰 울프의 글을 처음 읽은 맥스 퍼킨스의 마음이었다고 하면 (작가 입장에서든 지금 이 리뷰를 쓰고 있는 나를 대입한 것이든) 다소 우스운 과장으로야 느껴지겠지만 어쨌건 내 기분을 간단하게나마 전하기에는 나쁘지 않은 비유라 생각한다. 아, 이 두 사람을 알게된 영화 <지니어스>를 추천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어렸을 땐 비사교적이며 아주 내향적인 성격이었고 성인이 되어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후천적 사회화로 그러한 성향을 어느 정도 커버하는 스킬을 연마하게 된 게 그것인데, 그래서인지 (나와 마찬가지로) 내향적 성향의 친구들에게 말을 거는 취미 아닌 취미가 생기게 됐다. 심심하게 한담을 주고 받다 보면 상대가 가진, 모두에게 들려 주지는 않는 이야기 보따리의 존재를 알아채게 될 때가 있다. 이 보따리는 사실 인간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것인데 다만 내향적인 성향일수록 더 빨리 만들어져, 그 안에 같은 시간 대비 더 많은 이야기가 쌓여간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일정한 양을 넘어서면 보따리 자체의 면적이 무한하지 않다 보니 구멍이라도 뚫린 마냥 슬슬 밖으로 새어져 나오게 된다. 나는 사람들의 속 안에 쌓인 이 고르지 않은 알갱이 같은 이야기를 듣는 일이 참 좋다. 달고 쓰고 시고 맵고, 다양한 맛이 나는 이야기들을 운 좋게 맛보는 순간을 만나면 수지라도 맞은 기분이 든다.
이 소설 역시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 더는 그 안에 갇혀만 있을 수 없어 나오게 된 이야기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렇게 술술 나오는 이야기들은 읽는 재미가 참 좋다. 무질서한 의식의 흐름처럼 느껴지다가도 그 중심을 관통하는 뭔가가 함께 느껴지니까. 솔직히 나는 되다 만 페미니스트라서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하고, 내가 어설프게 배운 여성주의에 대고 답을 맞춰보는 순간도 더러 있었지만, 이론보다는 역시 여성인 누군가의 이야기 쪽이 진짜 여성 서사에 더 가까운 거겠지. 나도 모르게 교과서 같이 반듯한 여성 서사만 열심히 찾아 헤매다 오랜만에 완전히 다른 성격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어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소 묵직하고 씁쓸하면서도 다채로운 맛이 느껴지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