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부재로서의 선에 대하여 공모(비평)

대상작품: 초자연현상처리반 Renewal (작가: 창궁, 작품정보)
리뷰어: 김밀세, 1시간 전, 조회 20

선의 부재로서의 악

악의 존재에 대해 답할 수 있는 하나의 입장은 이렇다. 악은 다만 선(善)이 닿지 않는 음영이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결여로서의 악(privatio boni) 개념을 정립하였을 때, 이는 악의 문제로부터 교회를 자유롭게 하는 반석이 되었다. 교부철학 덕택에 교회는 주님의 은혜가 닿지 않는 곳엔 은혜가 닿도록 노력해야 할 일이지, 주님이 죄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어둠은 그저 빛의 부재일 뿐이니.

그러나 작품은 명확히 이 주류적 신학 입장과 대립하는 듯 하다.

“네 죄는 내가 짊어지마.”

대속은 본디 예수 그리스도의 업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죄악을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선 짊어진다는 것은 무게를 전제한다. 우리는 빈자리를 짊어질 수 없다. 결여는 들어 옮길 수 없고, 그림자는 한 사람의 등에서 다른 사람의 등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짊어지마”라는 단 한마디는, 발화되는 순간 이미 악을 음영에서 실체로 끌어내린다. 죄가 옮겨질 수 있는 무엇이라면, 죄는 있다. 무게를 지닌 채, 떠넘겨지고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적극적 사물로서 있다.

이것은 공교롭게도 아우구스티누스가 평생에 걸쳐 빠져나오려 했던 바로 그 자리다. 결여로서의 악이라는 교리는, 청년 아우구스티누스를 사로잡았던 마니교를 추방하기 위해 벼려진 무기였다. 악에게 존재의 자격을 주지 않음으로써 그는 신을 ‘악의 저자’라는 혐의로부터 구해냈다. 그런데 작품은 “네 죄는 내가 짊어지마”라는 한 문장으로, 교부가 힘겹게 내쫓은 그 실체로서의 악을 다시 불러들인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소환이 신학의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대속의 언어는 본래부터 물질적이다. 이사야의 종은 우리의 질고를 짊어졌고, 안셀무스의 구원은 무한한 빚을 갚는 회계로 그려진다. 짊어지고, 갚고, 대신 치르는 이 모든 어휘는 죄를 부피와 중량과 채무를 가진 무엇으로 다룬다. 결여로서의 악과 대신 짊어지는 대속, 정통 신학은 실은 양립하기 어려운 두 직관을 한 몸에 품고 있었던 셈이다. 작품은 바로 그 균열에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그리고 그 틈에서 허용되서는 안 되는 주체가 걸어 나온다. 인간이다. 안셀무스의 셈법대로라면 무한한 빚은 무한한 자만이 갚을 수 있고, 그래서 대속은 신이면서 인간인 자에게만 허락된 업이었다. 유한한 죄인이 타인의 죄를 대신 갚는 일은 회계상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짊어지마”라고 말하는 처리반의 인간은 둘 중 하나다. 끝내 갚아지지 않을 빚을 떠안는 헛된 자이거나, 구세주의 자리를 참람하게 빼앗아 앉는 자이거나. 작품의 비극과 숭고는 전자로 기울어지는 저울의 비대칭성에 있다.

여기서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작품은 ‘악은 선의 결여’라는 명제를 거부한다. 악을 짊어질 수 있는 실체로 세우는 순간, 그 빈자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물음이 우리를 다음 장으로 데려간다.

초자연현상으로서의 자연현상

초자연현상이라는 단어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탕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인화수소가 자연발화하는 원리가 알려져 있지 않았을 때, 도깨비불은 초자연현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사변적 실재론에 의하면, 초자연현상이라는 단어는 부적절하다. 인간의 관측과 별개로 초자연현상은 자연에 실재하기 때문이다.

엘리트 자녀들을 가둬 대한민국 정부와 기득권층에 ‘엿을 먹이는’ 한국총력고등학교란 초자연현상, 불로초를 찾아 들어온 인간의 수명을 빼앗아 ‘수명을 연장하는’ 십장생도란 초자연현상은 자연현상을 인격화하는 대표적인 작중 사례이다. 초자연이란 자연에 인격이란 가면을 붙이지 않을 수 없을 때 붙이는 접두어이다. 구체화하자면 십장생도 내부에서 십장생이 공생하는 시스템에 대한 이해다. 산과 소나무, 사슴과 바위, 거북과 물, 해와 학. 가만히 있으면 수명을 갈취하는 해와, 빠르게 움직이면 수명을 갈취하는 학이 그렇기에 공생을 맺었다는 작중묘사는, 해와 학의 내면에 대한 접근 없이 이들을 인격화하여 독자가 이해 가능한 형태로 제공한다.

반면에 암흑색맹은 감염된 인간을 통해 발화를 수행하는 초자연현상이다. 암흑색맹은 인간을 종종 비웃고, 결정적으로 통치한다. 따라서 암흑색맹은 십장생도처럼 인간의 인식을 통해 인격화된 자연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인식 이전에 자연화된 인격에 가까워 보인다.

이 두 사례는 ‘초자연’이라는 한 단어 안에서 정반대로 작동한다. 십장생도가 상관주의의 사례라면, 해와 학의 내면에 닿지 못한 채 공생이라는 인간적 서사를 입혀 겨우 이해 가능하게 만든 것이라면, 암흑색맹은 그 상관의 바깥에 놓인 실재의 사례다. 전자에서 인격은 우리가 밖에서 덧씌운 가면이고, 그 가면 뒤에는 우리가 영영 들여다볼 수 없는 자연이 무심히 놓여 있을 뿐이다. 후자에서 인격은 우리가 보태준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미 실재에 깃들어 있던 무엇이다. 십장생도의 인격은 벗길 수 있다. 그러나 암흑색맹의 인격은 벗길 수 없다. 애초에 우리가 씌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차이는 동사에서 드러난다. 대한민국은 십장생도를 처리한다. 그러나 암흑색맹은 인간을 통치한다. 처리란 얼굴 없는 자연에 얼굴을 붙여 다룰 수 있게 만드는 일, 곧 주체가 대상에게 행하는 일이다. 통치는 그 방향이 거꾸로다. 인식되기를 기다리던 대상이 도리어 인식하는 자를 부린다. 십장생도 앞에서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자이지만, 암흑색맹 앞에서 인간은 의미를 부여받는 자, 감염된 입을 빌려 비웃음을 듣고 다스려지는 자로 내려앉는다. 사변적 실재론이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서 끌어내렸듯, 암흑색맹은 처리반을 처리의 주체에서 처리의 대상으로 끌어내린다.

그리하여 ‘초자연현상으로서의 자연현상’이라는 명제는 두 갈래로 갈라진다. 한쪽에는 본디 자연이던 것이 인간의 가면을 쓰고 초자연으로 오인되는 길이 있고(한국총력고등학교, 십장생도), 다른 한쪽에는 본디 인격이던 것이 인간보다 앞서 자연 속에 스며들어 초자연이 되는 길이 있다(암흑색맹). 작품이 끝내 응시하는 쪽은 후자다. 인간이 나타나기 전부터 세계에 깃들어 인간을 비웃고 다스려 온 인격, 이름을 붙이고 작전을 세워도 끝내 벗겨지지 않는 얼굴. 그런데 이 지워지지 않는 인격의 정체를 끝까지 캐물으면 뜻밖의 답에 이른다. 그것은 우리가 덧씌운 얼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의 얼굴도 아니다. 그것은 자연이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흘러간다는 사실, 행위자 없는 다스림이다. 암흑색맹의 통치란 그 비인격적 운행이 인간의 눈앞에서 잠시 인격의 형상으로 응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운행의 본래 이름을 우리는 다음 장에서 부르게 된다.

자연현상으로서의 악, 악의 부재로서의 선

필자는 암흑색맹을, 무질서는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과 빛은 어둠의 부재일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자연법칙이 결합한 결과로 읽는다. 이 두 번째 명제는 1장에서 본 아우구스티누스의 비유를 정확히 뒤집은 것이다. 교부는 어둠을 빛의 부재라 했다. 빛이 먼저 있고, 어둠은 그 빛이 닿지 않은 빈자리에 불과했다. 그래서 악은 선의 부재였다. 그러나 암흑색맹의 세계에서는 순서가 뒤바뀐다. 먼저 있는 것은 어둠이고, 빛이야말로 그 어둠이 잠시 비워진 자리다. 빛은 어둠의 부재다. 그러므로 선은 악의 부재다.

이 뒤집힌 법칙을 떠받치는 것이 열역학 제2법칙이다. 우주의 기본값은 무질서이고, 질서는 그 기본값을 거슬러 잠시 솟아오른 희박한 예외다. 빛, 아니면 우리가 선이라 부르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은 우주가 본래 그러한 어둠을 국소적으로, 일시적으로 밀어낸 자리에서만 반짝인다. 우주가 식어 열적 죽음에 이르면 남는 것은 빛의 부재가 아니라 어둠의 충만이다. 어둠은 무엇이 빠져나간 결과가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내 도달하는 종착지다. 1장에서 악을 짊어질 수 있는 실체로 보았듯, 3장에서도 어둠은 ‘없음’이 아니라 반드시 증가하는 ‘있음’이다. 결여의 자격은 이제 어둠이 아니라 빛에게, 악이 아니라 선에게 돌아간다.

이 독해를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암흑색맹에게 내면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황예담의 내면을 빌려 말을 걸어오지만, 정작 제 욕망은 한 번도 발설하지 않는다. 십장생도의 해와 학에게는 적어도 인간이 빌려준 동기라도 있었으나, 암흑색맹에게는 그조차 없다. 무엇을 원해서 인간을 비웃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엔트로피가 증가를 ‘원하지’ 않듯, 암흑색맹도 악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증가할 뿐이다. 다스리는 자는 없는데 다스림은 있다. 악이 증가하는 것은 누구의 의지도 아닌, 자연적인 결과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짝을 더 디디면 함정이 입을 벌린다. 악이 자연이라는 명제로부터, 악이 정당하다거나 받아들여 마땅하다는 결론으로 미끄러지는 일이다. 무어가 자연주의의 오류라 부른 것, 흄이 존재(is)와 당위(ought) 사이에 그어 둔 건널 수 없는 금이 바로 이것이다. 자연이 그러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단 한마디도 일러주지 않는다. 어둠이 기본값이라 해서 어둠에 동의해야 할 이유는 없다. 우주가 식어간다는 기술은 식는 대로 두라는 명령이 결코 아니다. 자연이 침묵하는 그 자리에서, 인간은 자연이 끌어내 줄 수 없는 당위를 스스로 세운다.

그러므로 처리반의 분투는 물리법칙에 맞서는 어리석은 자들의 헛수고가 아니다. 그것은 어둠이 기본값인 우주에서 굳이 빛을 켜는 일, ‘그러하다’에 맞서 ‘그래서는 안 된다’를 밀어 넣는 부자연한 의지의 사건이다. 그리고 이 부자연한 빛, 어둠을 국소적으로 밀어낸 자리에 피어나는 선이야말로 이 글이 마지막으로 부르려는 이름, 악의 부재로서의 선이다.

악의 부재가 선일 때, 우리는 착각해서라도 능동적으로 악을 제거해야 선을 얻을 수 있다. 한태준이 황예담을 그저 구해냈듯이, 성유나가 네 죄를 짊어지겠다고 허언해서라도 몰아냈듯이, 황예담이 다시 한태준을 구해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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