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같은 사람이 되어 너와 같은 선택을 하고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9 (작가: , 작품정보)
리뷰어: 탁문배, 19년 11월, 조회 71

사랑이라는 단어는 글로도 말로도 사용하기  힘들어졌습니다. 오래 전부터 아주 폭이 넓은 단어였고(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근대 이후로는 ‘사랑’이 가장 잘 팔리는 감정이 되면서 여기저기서 마구 사용되다 보니 이제 사랑한다고 하면 무슨말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 비스티보이즈에서는 ‘사랑한다고 **년아!’라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대사도 나오지요(그것도 폭행 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등장인물 A가 B를 사랑한다고 해도 전화상담사 평가를 잘해달라는건지 그래도 결혼까지는 해보겠다는 뜻인지 목숨을 걸고 대마왕의 손아귀에서 구해오겠다는 뜻인지 아리송합니다. 이런 모호함을 타파하려면 차라리 사랑한다는 말은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문제의 사랑이라는 단어를 피해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의한다면, 저는 막대한 시간과 자금, 그리고 건강이 투자된 여러 차례의 술자리를 통해 두 가지 단계로 정리한 바가 있습니다.

1. 저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2. 이왕이면 나와 함께.

이 소설의 화자에게는 두 가지가 모두 좌절되었고, 사랑은 지독한, 병적인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바다처럼 깊은 그리움이 영혼을 집어삼키고, 이야기는 예정된 결말로 비틀거리며 걸어갑니다. 스포일러가 이미 있었던것 같은데 이 뒤에도 있습니다.

 


 

화자의 연인은 죽었습니다. 살해당했다는 추론이 유력합니다. 신체 일부를 남기고 자살하기는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화자는 이전에 나눈 대화를 통해 연인이 살인청부라는 방법으로자살을 택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딸의 죽음으로 인해, 화자의 연인은 물과 관련한 기벽이 생겼을 정도로 고통스런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화자에게는 연인과 같은 기벽이 생깁니다. 결국 예전의 연인처럼 화자는 바다의 환영을 보게 됩니다.

사실 사랑 보다는 상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역학 제2법칙이 있는 세상에 살고, 영원한 사랑은 없습니다. 고로 사랑에는 당연히 상실이 따릅니다. 물론 상실에도 여러 방식이 있고 화자가 처한 상황은 특히 가혹합니다. 발목만 남은 연인과 투샷을 찍게될 정도로, 끔찍한 일입니다. 그리고 화자의 연인 역시 딸의 상실로 괴로움을 겪습니다. 물맛이 짜게 느껴질 정도로요. 화자는 개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길 하며 앞으로 나가야한다고 하지만 연인은 더 상처받을 뿐입니다. 정신의학적으로도 별로 좋은 조언은 아니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화자는 연인이 겪었던 고통을 똑같이 겪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증상들이었지요. 병적인 전이라고 해석할수 있으나 저는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닮아 간다는 동화로 생각했습니다. 혹은 깊은 그리움이 뭔가를 기억하는 방식일수도요. 역시 심란한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혼자 누워 전 남편의 버릇인 코 고는 흉내를 내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네가 이제 없으니, 네가 되어보기라도 하는 것이지요.

그 점에서 생각할때, 어쩌면 화자는 연인을 잃고나서야 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게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자는 손을 다쳐가면서 연인의 흔적을 찾지만, 연인이 잃은 딸, 자신이 질투하기까지 했던 희수를 찾기도 하지요. 같은 것에 아파하는 것이 모종의 완성이라면 화자는 그 지점에 이른것입니다. 잃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는 점이 슬프지만요.

리뷰의 성격이 비평이긴 한데 비평을 할만한 지점이 고민이 됩니다. 디테일하게는 경찰의 수사 절차에 좀 문제가 있는건같긴한데 이 소설이 살인사건 수사물은 아닌 관계로 필요한 만큼의 개연성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보다도 내용적인 측면에서, 이 작품은 화자가 느끼는 좌절의 감정을 따라가는 이야기인데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화자의 연인은 바이섹슈얼이고, 한때 가졌던 것처럼 부모자식이 있는 그런 가정이 좋다고 하지요. 화자의 좌절은 연인이 살아있었다 해도 예견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서두에 남자 둘이 아이를 돌보는 가정의 모습을 보기도(환영이겠지만…) 할 정도로, 소망하지만 갖지못할 행복이 있습니다. 연인이 어쩌면 헤어진 와이프를 다시만나 잠적해 버린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화자의 마음에 응어리진 문제입니다. 연인의 죽음의 진상이 끝까지 모호하기에, 어쩌면 그런 생각은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화자는 다각적으로 고통받습니다.

저는 시스젠더헤테로입니다. 예전에는 호드라는 정체성만 갖고있었는데 요즘엔 정확한 용어가 생긴것 같습니다. 어쨌든 처음 리뷰를 쓰기 시작할때는 인간 보편의 고통에 집중해서 퀴어 이야기는 그냥 안 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화자의 연인은 한때 여성과 가정까지 꾸렸던 양성애자고, 화자가 겪는 고통의 근거도 상당부분 그곳에 기인하는 점에서 무리였습니다.

소수자의 고통은 표현되어야 하고 더 잘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좌절될 수 있으나 그 이유가 성별인 사회는 없어져야 하고 없어질 것입니다. 다만 이 작품에는 고통의 전시를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설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퀴어문학(이딴 장르구분은 신물이 납니다만)을 많이 접한 것은 아니지만 당연히 그 저변이 매우 좁을 것이고, 한 글자라도 더 보태도 모자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러나, 매우 주제넘은 말이라서 쓰면서도 망설여집니다만, 화자의 선택지를 죽음으로만 몰아가는 이야기는 그런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세련된 방식은 아니라고 봅니다. 중간쯤 가니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결국 그 기대를 배신당하지 못해서 독후감이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죽을 만큼 괴롭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그냥 수사가 아닐 것입니다. 성소수자를 둘러싼 우리사회의 환경은 그야말로 환상적으로(그렇습니다. 장르는 판타지입니다.) 야만적입니다. 당연히 그것들을 고발해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고통받고, 계속 고통받는 이야기는 이런 상황의 대안을 생각하기 보다는 저를 지치게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소설에 불만이 있는건지 현실에 불만이 있는건지 저도 혼동되는군요. 유치하게 해피엔딩 타령이나 하는것 같아 속이 상하지만, 우리가 다른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현실이 되지도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화자가 느끼는 그리움의 감정이 읽는 동안 주섬주섬 다가와 서글프게 느껴졌습니다. 타인의 육체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가장 잘 떠오르는 사랑의 매개체지요. 반드시 성애의 도구가 아니라도요. 남은 발목을 두고 남자친구가 참 예쁘다고 말하는 화자에 대해, 그로테스크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 매우 사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장면들이 힘있게 잘 그려진 작품이었습니다. 다만 구성에 있어서는 좀 더 느릿한 호흡으로 갔어도 좋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화자의 연인이 이야기에 필요한 만큼은 설명되었지만, 너무 모호한 사람으로 그려졌다고 생각되서요.

다시말하지만 원래 퀴어이야기는 안 하려고 했습니다. 사랑과 상실은 보편적인 것이니까요. 이 작품도 그래야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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