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새벽시간에 글을 읽으면 다른 시간대보다 감수성이 차오르는게 사실입니다.
이 글도 약간 말랑말랑하고 조금 예민한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완독하고 나니 제가 글 한편을 깔끔하게 완성한 것 같은 개운함이 밀려드는 걸 느꼈습니다.
이 글은 전형적인 ‘약자’의 이야기입니다.
‘wiinner takes it all’이 법이자 질서가 된 이 사회에서 약자도 두 부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온힘을 다해 매달려있다가 미끄러져 떨어진 부류와 두려움에 손을 뻗어보지도 못하는 부류, 이 글의 주인공은 후자에 가까워 보입니다.
사람의 모든 가치가 ‘경쟁력’의 범주에서 평가받아야하는 시대다보니 적극적으로 자신을 어필하지 못하고 이건 내자리야 하고 소리치지 못 하는 주인공은 응당 자신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서도 밀려나는 처지가 됩니다.
그러던 중 아무런 이유없이 손을 내미는 낯선이의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유혹. 이런 이야기에 안 나오면 섭섭한 전개지만 진부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전개가 시원시원하고 과도한 심리묘사나 부연설명을 과감히 줄인 작가님의 선택이 돋보이는 구성이라고 생각됩니다.
작품설명에서부터 뭔가 나올 거라고 생각이 들만한 작품소개를 읽고 글에 빠져들어서 그런지 어떤 반전의 묘미가 있지는 않았지만, 주인공의 추락에서 분위기전환- 위기- 결말로 이어지는 과정은 짧은 분량임에도 허술한 부분이 없이 만족스러운 글읽기를 지속하게 해주더군요.
보통 이런 글의 경우 선과 악의 경계를 명확히 해서 독자들이 받는 카타르시스를 높이기 위해 이분법식 인물구성을 가지는 걸 많이 봐왔는데 이야기에 몰입하기엔 편하지만 글의 신선함을 반감시키는 요소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약간 다릅니다.
주인공의 경우 작품의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분노하기로 결심한 상태입니다. 이야기도 그 지점에서 시작되죠.
물론 조커와 같은 마인드는 아닙니다. 숯이 크게 불길을 올리지 않아도 검은 재질밑에서 끊임없이 열기를 내듯, 주인공 또한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에 향한 분노를 펼쳐내는데 그 장면장면들이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 가지고있는 그것과 다르지않아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더군요.
제가 특히 매력적으로 보았던 인물은 김팀장입니다.
등장인물이 많지않고 김팀장 또한 결말부분에서 잠깐 존재감을 드러내긴 하지만, 여기저기서 지겹게 보아온 선악의 경계 바깥에 있는 독특한 인물이자 현실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살아있는 캐릭터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직원들에게는 강한 언행과 과도한 업무지시를 서슴지않는 전형적인 꼰대상사이고, 주인공에게는 일처리가 확실하고 열정과 이성을 갖춘 정직한 인물입니다. 그런 캐릭터를 단지 몇 문장으로 표현해내신 작가님의 솜씨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인공 또한 주변인들에게는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캐릭터의 전형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세상에 분노를 표현하기로 결심한 그녀의 행보는 그야말로 파격적이고 거침이 없습니다.
장기밀매조직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외딴 저택에 겁없이 찾아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과 맞닥뜨린 후에도 반격을 주저하지 않는 모습이 속으로 많은 감정들을 구겨넣으며 사는 제게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남겨주었습니다.
작가님이 글의 분량을 처음부터 계획하시고 쓰신 건지, 작품의 결말은 약간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언급만 되고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은 그렇다 해도, 사건에 대한 마무리는 어떻게든 되었으면 사이다가 한병 더 추가되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감상을 가지게 되네요.
갈등이 해소되는 적절한 시점에 걸려오는 김 팀장의 전화는 ‘이 사람이 주인공을 어디서 보고 있었나.’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첫 문장부터 결말까지 막히는 부분없이 술술 내려가는 글의 유려한 전개가 오랜만에 글을 읽으면서 개운한 해방감을 들게 해주었습니다.
최근에 외국 영화 ‘조커’가 기대 이상의 반응을 얻으면서 현대인들에게 내재된 ‘분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는 과거에도 많았고, 앞으로는 더 많이 나올 거라고 예상됩니다.
사람들간의 격차가 고착화되어버린 현대사회에서 가지지 못했고 앞으로도 가질 가능성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분노는 더욱 쌓여가겠지요.
하지만 우린 조커가 되지 않을 겁니다. 억지로 웃으려 하지도, 웃기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불특정 다수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는 인생을 살아나갈 테죠.
그래서 저는 어느날, 세상을 향해 분노하기로 결심한 이 사람을 응원하기로 했습니다.
이 글의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제 맘속에 있던 분노는 조금 사그라드는 것 같았거든요.
앞으로도 이런 그녀(혹은 그)들이 세상에 많이 나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그녀를 세상에 내보내주신 작가님을 또한 응원해야겠군요.
이 작품은 단편과 미스테리를 사랑하는 제게 교과서같은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글을 쓰면서 점점 쓸데없는 미사여구가 글을 채워가고 있는 걸 깨닫고 있던 요즘에, 이 작품은 짧은 분량에 이야기의 안정적인 전개, 인물에 대한 이해와 긴장감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멋지게 해결하는 짜릿함까지 모두 담은 완성도 높은 단편소설입니다.
브릿G의 독자분들께도 김이 솨아하고 솟아오르는 시원한 사이다 한잔을 같이 하자고 청하고 싶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