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규칙괴담’이 확립되기 전에, 필자가 ‘나폴리탄 괴담’과 ‘규칙괴담’의 장르를 혼동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잘못된 용어 사용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점 유의하여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호러 장르는 매우 매력적이면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장르입니다만, 글로 공포라는 감정을 독자에게 자아내게 하는 건 퍽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공포라는 감정에 대해서는 호러 장르를 쓰시는 작가분들만큼이나 그 정의와 철학이 다양하게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기본적으로 ‘공포’라는 감정은 <생존에 대한 위협>이라는 매우 원시적인 감각 위에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존에 대한 위협>이라는 뿌리를 건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맞습니다, 그게 ‘자신의 일’처럼 느껴져야 합니다. 그래서 공포라는 건 다른 세계 이야기,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지면 그 정도가 퍽 낮아지며 시시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어, 밤 늦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복도 사이에서 칼을 들고 우두커니 서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고 해봅시다. 집으로 들어가려면 그 복도를 반드시 지나야 합니다. 만약 이게 정말로 현실로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었다면 상당히 두렵고 당황스러우면서 소름끼치는 상황이었겠지만(뉴스에 나온 것처럼 낯선 이에게 이유도 모르고 칼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이게 글로 표현되어 소설에 등장하면 (호러에 대한 내성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지만) 대개 시시하게 느껴지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래서 많은 호러 소설, 호러 영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호러에 ‘현실성’을 가미하여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서술하는 것에 상당한 심혈을 기울입니다. 공포 문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H.P.러브크래프트도 메사추세츠주라는 실제로 존재하는 미국의 주(州)에 ‘아컴’과 ‘미스캐토닉 대학’이라는 가상의 도시를 만들어내고, 또 ‘네크로노미콘’과 ‘알아지프’라는 책의 역사를 상당히 상세히 서술함으로써,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도시인 것처럼 만들어놓고 소설을 전개하였습니다.(그 탓에 실제로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서는 ‘네크로노미콘’이 있냐며 대출 가능하냐는 질문이 종종 온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도 근거 없는 괴담일지 어떨지는 모르는 법입니다 ㅋㅋㅋ) 스티븐 킹의 경우엔 주로 자신의 고향인 메인 주를 배경으로 하여, ‘데리’와 같은 가상의 도시를 만들어 이야기를 펼쳐나갑니다. 영화의 경우엔 실제 존재하는 마을이나 다큐와 같은 색채를 입히려고 노력하는데, 이런 특징을 단적으로 잘 볼 수 있는 게 모큐멘터리 형식, 특히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형식이 다른 장르들보다도 특히 ‘호러’에서 각별한 애정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건 호러의 특징 중 한 면만 조명해서 추구한 것일뿐, 충분히 ‘비현실적인 판타지적 배경과 설정’으로 호러를 탁월하게 나타낸 작품들도 있을 겁니다. 스티븐 킹이 공포라는 감정을 세 가지로 분류해 놓은 것처럼, ‘생존에 대한 위협’만이 공포의 전부는 아닐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건, 호러 장르가 읽는 사람 혹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혐오스럽고’, ‘(마치 내가 쫓기는 것처럼)손발에 땀을 쥐게 하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보이지만 예감이 틀리길 바라며)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음 장면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작품을 읽고난 뒤에 일상에서 무섭다는 감정이 들게 만들까’ 고민하며 자주 내놓는 카드가 ‘작품’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려 현실 속에 훅하고 내미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 식의 시도를 했다가 큰 파장을 일으킨 영화로는 일라이 로스 감독의 <호스텔>라는 영화가 있죠. 타지에서의 납치 고문이라는 소재에 지극히 현실적인 색을 입히려다가, 슬로바키아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게 만들어 나라 단위로 항의를 받은 경우도 있으니까요. 나홍진 감독의 <곡성>과 이번에 나온 아리 에스터 감독의 <미드소마>는 그런 문제는 순탄하게 넘어갔습니다만… 어찌보면 호러를 쓰는 사람으로서 이는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도시괴담의 필수요소가 구체적인 시간적 배경과 구체적인 공간적 배경이라는 걸 생각하면, 호러라는 장르의 정체성을 위해 현실적인 배경이 필요는 한데, 호러라는 장르 특성상 좋은 일이 일어나진 않으니까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본 소설, <에덴브릿지 호텔 신입 직원들을 위한 행동지침서>는 무척 흥미롭고 관심이 가는 작품이었습니다. 이하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작품을 온전하게 느끼고 싶으신 분들은 작품을 읽고난 뒤에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우선 이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의 구조에서는 벗어나 있습니다. 2019년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아름드리 호텔’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1975년부터 지금까지 44년 동안 운영해온 ‘에덴브릿지 호텔’이라는 구체적인 공간적 배경이 튀어나오는 걸 빼면(괴담의 가장 중요한 두 요소죠), 흔히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승전결, 인물들, 사건이라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제목 그대로 ‘에덴브릿지 호텔 신입 직원들을 위한 행동지침서’, 즉 ‘지침서’ 양식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정말로 존재하는 호텔의 지침서를 주워다가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장소의 부속품을 보게 되었다는 것만큼이나, 가상으로 존재하는 배경에 강한 현실성을 부여하는 건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양식만으로 오롯이 현실성이 부여되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우린 소설을 읽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고, 에덴브릿지 호텔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고 작가가 만든 것이며, 여기 적힌 내용은 허구라고 (마치 마술을 보며 저건 다 속임수라고 머릿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되뇌는 것처럼) 전제하고 읽어가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상당히 재밌었다고 생각한 것은, 썩 과장되지 않게, 엄청나게 비현실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서술하지 않고 뭔가 호텔에서 일하다보면 마주할법한 일들에 뭔가 뒤에 진상이 있는 것처럼, 뒤가 구리게 써놨다는 겁니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거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는 한 줄도 적혀있지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괴담을 보통 ‘나폴리탄 괴담’이라 부르는데, ‘나폴리탄’이라는 스파게티를 이용한 괴담이 그런 종류의 괴담 형식을 일컫는 장르명으로 변한 겁니다.(이 원형이 되는 나폴리탄 괴담은 검색하면 쉽게 찾아 읽으실 수 있습니다) 한때 한국에서 굉장히 유행한 ‘이해하면 무서운 이야기'(줄여서 ‘이무이’)와 같은 느낌의 괴담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해 속 시원히 답을 알려주지 않고, 단서들과 짐작할 수 있는 수상한 징후들만 툭툭 던져주고서는 이야기를 그냥 끝내버리는 괴담입니다. 러브크래프트가 좋아하는 ‘미지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는 것이기도 하고, 스티븐 킹의 말을 빌리자면 ‘쿵쿵거리는 문 뒤에 뭐가 있는지 안 보여주기’에 해당하는 형식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도 그런 식으로 단서들만 늘어놓는데, 그 성격으로 ‘심령현상’ 혹은 ‘악마’와 관련된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공포는 정작 정체를 밝히면 김이 픽하고 빠지며 시시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전 오히려 이런 식으로 ‘목사’나 ‘기도’, ‘성경책’ 같은 단어들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추측하게 만들어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자아낸 게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초자연적 존재가 대놓고 나오지 않아서 소설의 색채를 현실적인 분위기에 머물게 만든 것도 좋았고요. (즉, 이런 일이 목격되는 호텔이 실제로 현실에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렇게 수상하고 뒤숭숭한 내용들을 알려주는 한편으로는, 그런 뒷말만 없다면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는 일들을 적어놔서 ‘현실성’과 ‘호기심 유발’을 동시에 잡습니다. 특히 이 궁금하게 만드는 ‘호기심 유발’은 이 소설이 허구라는 것을 잠시 잊고 몰입하게 만들기 아주 좋은 장치라 생각됩니다. 물론 이 소설은 그 호기심을 긁어주지 않고 내버려둬서 닿지 않는 등의 가려움을 긁지 못 하는 사람처럼 방방 뛰게 만듭니다만 ㅋㅋㅋ (이러한 전개는 사람들의 호불호가 좀 갈리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신입직원을 위한 지침서’라는 형식은 이러한 진상 가리기에 은근한 명분도 줍니다. 이 유서 깊고 역사가 오래된, 그래서 여러 일도 많았을 이 호텔에 대해, 이제 막 들어온 <신입직원>에게 필요이상으로 시시콜콜하게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특히 그게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일이라면 말이죠.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최소한의 매뉴얼만 알려주고 숙지시키면 될 일인 겁니다. 즉, 가려진 진상에도 현실성이 부여되어 ‘충분히 있을 법하다’고 느끼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마지막에 그래도 소설을 읽고 있는 거라서 이건 허구라고 생각하던 독자에게 꽤나 즐거운 현실감을 선물해줍니다. 쭉 수상쩍은 내용들을 적어가며 ‘이렇게 기묘한 분위기로 무섭게 하는 이야기인가?’라고 생각했던 독자에게 원래라면 있어서는 안 되는 조항들을 읽었냐고 물어서 작품 내와 작품 밖을 구분하지 않고 독자를 <사건의 경험자>로 끌어들입니다. 괴담을 많이 쫓아다니며 읽은 사람에게는 그렇게 참신한 기법은 아니지만, 전 이 소설에서 상당히 영리하게 사용되었다고 생각해 꽤 인상 깊었습니다. 저만 그런 걸지 모르겠으나, 보통 이런 글을 읽을 때 조항의 번호는 크게 신경 안 쓰고 사실 내용에 더 많은 주의를 하지 않습니까?(아니라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단락은 다시 위로 올라가 그런 조항이 있었는지 확인하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는 작가가 만들어놓은 현실에 마지막으로 몰입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딘가에 떨어진 지침서를 주워다가 몰래 읽었다가 X된 기분’을 느꼈습니다. 호러 장르에서 섣부른 호기심은 화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니까요. 달리 말해, 그런 지침서를 읽고 불가해한 경험을 하는 주인공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주인공이 제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초반에 에덴브릿지 호텔이 루머와 비방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부분이 참 인상깊었습니다. 그 뒤에 지켜달라는 조항들을 보면 분명 ‘뭔가 있긴 있는’ 호텔이라서 ‘이 호텔에서 일하거나 묵어도 괜찮아?’라는 의심이 절로 들게 만드는데 말이죠. 이렇게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겉으로는 짐짓 해맑고 평온한 척 얼버무리는 분위기의 글들이 저는 좋더라고요.
정말로 호텔 신입직원 지침서의 양식으로 프린트해서 만들어 이곳 저곳에 뿌리고 다닌다면 꽤나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소설이었습니다. 짧은 분량에 복잡한 장치나 기교는 없지만, 꼭 길고 복잡한 글이라고 좋은 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인터넷에 유행하던 괴담에 대한 향수를 건드리면서, 또 어떤 공포가 사람들을 사로잡는지 볼 수 있었던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으로도 현실과 작품의 벽을 부수는 호러 장르가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