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hate)에 타겟이 없다면, 그것은 바로…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타오르다 (작가: 엄길윤, 작품정보)
리뷰어: 이두영, 19년 6월, 조회 117

1. 내가 개인적으로 트위터를 하지 않는 이유

 

지금처럼 온라인 미디어로 소통하는 게 일상 생활에 깊숙이 침투한 역사가 있었을까. 다들 지금보다 더 하면 더 하지, 앞으로도 모바일 기기를 필두로 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이 더욱 활성화 될 것이라는 생각에 특별히 이견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그것이 인스타그램이고, 트위터이고, 유튜브이며, 페이스북이다. (누군가에겐 브릿G이다.) 카카오톡은 스토리콘텐츠 분야와 금융 분야까지 영역을 넓혔다.

온갖 애플리케이션이 커뮤니케이션의 창구로 쓰이고 있으며, PC통신 시절 가끔 일어날 법한 ‘온라인 접촉 이후 오프라인 만남’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흔해보일 정도이다. 30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현상들이 엄연한 현실로, 그것도 점점 더 익숙해지는 광경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꺼려하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이 트위터이다. 물론 나의 판단착오일 수도 있겠지만, 유독 트위터가 나에게 감정적 소모를 심하게 일으킨다는 불편함 때문이다.

페이스북도 혐오야 넘치고 인스타그램도 악플은 쉽게 볼 수 있으며 유튜브에 떠도는 가짜뉴스가 어제 오늘이 아니건만, 그럼에도 유독 나는 트위터를 살필 때 감정 기력이 금방 금방 소진되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그 이유를 트위터 특유의 140자 제한 디자인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텍스트 분량 제한이 촌철살인의 화법을 구사하기엔 좋지만, 길게 써야 할 내용은 길게 써야하는 법이거늘 그렇지 못하다는 단점이 트위터의 근본적인 설계상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이를 보완하는개 이른바 트윗 타래, 혹은 에버노트 등의 링크를 통한 장문의 내용을 게재하는 것이지만, 리트윗은 타래가 아닌 작은 트윗 하나를 전파하며, 그것은 짧은 내용으로 말미암아 감정적 곡해를 유발하기 너무 용이하고다.

더군다나 감정 담긴 트윗들이 수직 스크롤로 끝도 없이 게다가 순서도 없이 뒤죽박죽 출력되는 게 지금 트위터의 디자인인지라, 트위터를 살피다보면 ‘대체 내가 집중하게 된 최초의 발단이 무엇이었더라? 최초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더라?’하는 것을 나도 모르게 망각하게 만들고는, 종래에 가서는 특정 감정에 잔뜩 함몰되었던 피로감만 남기더라는 점, 이 점이 나에겐 너무 피곤하다. 그래서 트위터는 그냥, 가끔 눈팅으로 훑어보는 수준으로만 활용한다. 그렇다고 딱히 페이스북이나 다른 걸 딱히 더 하는 것도 아니고. (브릿G는 한다.)

트위터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너무 용이하다. 만인에게 분노함이란, 분노의 대상이 추상적이라는 사실의 반증이다. 즉, 분노의 대상에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타오르다>는 그저 터지기만 하는, ‘대상 없는 분노’를 다룬 이야기이다.


2. 무차별적 증오의 은유

 

좀비물에 기본처럼 된, 흔히 보이는 규칙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좀비에게 물리면 좀비가 된다라는 점, 또 하나는 좀비로 변하는 원인이 바이러스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식의 설정.

두 규칙 모두 좀비물의 효시격 중 하나인, 리차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자는 ‘뱀파이어에게 물리면 뱀파이어가 된다’는 유구한 전통이 좀비에 대한 설정으로 넘어온 것이요, 후자 또한 <나는 전설이다>가 사람들의 변이 현상 원인을 박테리아 때문이라고 밝혀낸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후에 여러가지 다른 형태들이 등장하지만, 오늘날 좀비물의 기본적 구성은 이 범위에서 작품의 의도나 다른 장르와의 혼합 등을 통해 디테일이 변경되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타오르다>는 비록 작품에서 좀비란 표현을 쓰진 않지만 좀비를 연상시키는 존재가 등장하는데, 다른 좀비물과 차이가 있으니, 그것은 ‘물려서’ 그 결과로 ‘감염되어’ 개체수가 확산된다는 식의 좀비물과 달리 ‘불’이라는 것이 사태를 확산시킨다는 점이다.

주목할 점은 문제의 원인, 즉 불이 주인공의 분노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자신의 결과물에 주인공 스스로 위협을 느낀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흔히 볼 수 있는 혹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루저‘로 그려진다. 전형적인 루저가 자신의 비뚤어진 시선으로 세상 만사와 모든 이들에게 증오의 감정을 품는 왜곡된 심정 또한 잘 표현되어 있다. 사태의 원인, 주인공이 만들어낸 불, 그것은 주인공의 내면에 쌓이고 쌓인 무차별적 증오가 바깥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인 셈이다.

그런데, 그렇게 무차별적 증오로서의 화마를 현실로 옮기더니,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굴던 주인공은 느닷없이 변한다. 죽음의 위협에서 도망가려고 발버둥친다. 결말에 이르러 이렇게 말한다.

그저 죽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주인공의 진짜 소망은 바로 이것이었다.


3. 타겟 없는 증오는 무엇과 같은가

 

슬라보예 지젝은 2010년대 서구권에 발생한 일련의 시위 또는 폭동 등을 두고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실천 운동이 아니라, 그저 당장의 불만을 표출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운동들이라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근본적인 원인을 타파하는 움직임이 아니라, 단지 분노를 파괴적인 움직임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라는 말이었다. 분노의 진짜 원인은 자본주의 사회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들 때문인데, 정작 그 모든 시위와 운동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겨냥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그러면서 그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로 ‘답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다!’라고 대놓고 진술했다. 동의는 각자의 몫이다.)

사람은 11명인데 의자가 10개라면, 누가 의자에 앉아야 할까?

저마다 의견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다리가 멀쩡한 한 명이 서 있자고, 의자에 오래 앉았던 사람이 일어서라고, 하나둘셋을 외치고 빨리 앉는 놈이 임자인 걸로 하자고.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11명인데, 왜 애초에 의자가 10개 밖에 준비되지 않았는가? 10개 뿐인 의자를 준비한, 그것이 진짜 문제 아닌가? 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우리는 의자가 10개 뿐이라는 게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한 채, 눈 앞에 있는 타인, 의자에 앉고자 승부를 겨뤄야 할 ‘잠재적 경쟁자들’을 적대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 더 익숙하다.

그리고 그 잠재적 경쟁자는 무수히 많으며, 그 무수한 경쟁자에게 증오를 품는 일은 너무나도 허다하다. 외국에서 넘어온 난민에게 일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젊은이, 능력도 안되는데 여성할당제 때문에 내가 취직을 못했다고 박탈감을 느끼는 남성, 인종간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유색인종을 합격시킨 결과 내가 이번에 대학 입학에 탈락한 이유가 백인이라서 역차별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분통을 터뜨리는 학생. 연대로 세상을 바꿔야하는데 꼭 저렇게 빻은 소리를 하는 놈들이 있어서 세상이 안바뀌는 거라며 불특정 다수의 대중/민중 집단을 내려다보는 자칭 진보/자칭 지식인/자칭 무슨주의자&각종’-이스트(-ist)’들-실상 자신이 엘리티즘에 빠졌다는 것은 정작 모르는 자들, 시대적 질서의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 채 우리 때에는 이보다 더한 고생을 하였건만 요즘 세상은 하여튼 큰일이라며 혀를 차고 눈을 흘기는 고령자 혹은 자칭 보수.

이것이 열등감으로 빠지고 그 열등감이 더 나아가 분노로 성장하여, 그 분노가 실질적인 행동으로 드러날 때, 재앙은 탄생한다. 그 분노는, 사실 자신이 그런 열등감을 느끼게 되어버린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또다른 타인들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발현되기 때문에. 분노의 이유는 열등감이요, 열등감이란 사실 ‘나도 잘 살아보고 싶어’라는 소망이 무너지고 붕괴된 결과이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하자.

증오(hate)에 타겟이 없다면, 그것은 바로 증오의 대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조차 못했다는 것과 같다. 증오의 대상이 불명확하므로, 증오로 말미암은 분노 표출은 만인을 향해 파괴라는 방식으로 날아간다. 그러나 그렇게 파괴된 대상들은 증오가 부수고 싶던 진짜 타겟이 아니므로, 증오는 달래지지 않는다. 도리어 반작용으로, 증오를 표출한 그 자신에게 위협이 되어 되돌아갈 뿐.

고로, 타겟 없는 증오는 무엇과 같은가

“나도 제대로 된 삶을 살아보고 싶어”라는 마음의 일그러진 폭발이다.

<타오르다>는 일그러진 폭발을, ‘그저 죽고 싶지 않을 뿐’인 발버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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