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에는 소설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소설을 읽지 않은 분들은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표면적으로는 잘 쓰여진 좀비 소설
우선, 이 소설은 매우 재미있다. 흔해빠진 좀비 이야기라 볼 수 있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좀비 소재의 이야기들과 차별되는 점은 철저히 개연성에 기반하여 직조되었다는 점이다. 최초의 트리거가 되는 소해면상뇌증(광우병)의 인수공통감염병으로의 변이가, 남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연천의 한 도축장에서 일어난다는, 특수한 시공간적인 조건을 가정한 이야기이다. 변이광우병이란 트리거, 남북미 정상회담이라는 특수한 정치적 변수, 그리고 한우농가라는 이익집단의 이기주의가 맞물려, 폐기처분되어야할 변이광우병에 걸린 소들은 뇌와 내장만을 제거한 채, 지육은 냉장 보관된다.
그러나, 국방부장관은 이 막대한 광우병 걸린 소고기 지육을 매수하여 군 부대 장병들에게 지급하기로 결정하고, 일주일에 걸쳐 매일 한우를 배식 받아 배부르게 먹었던 전방 부대의 장병들은 모두 좀비로 변하게 된다.
주인공 정세정 이병은 채식주의자다. 어떤 신념 때문에 채식을 하는 게 아니라, 몸이 거부해서 채식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또다른 주인공 지연희 소위는 한우 배식이 있던 기간에, 해외로 긴 휴가를 다녀오게 되어 좀비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정세정 이병의 연상의 여자친구인 연희는 수의사로서, 연천 도축장에서 광우병변이를 눈치채고, 페이스북을 통해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경고하고자 하나 정부 고위 관계자의 압박으로 움직인 경찰에 의해 압수수색을 당하고 직장에서 면직 처리 된다. 그리고, 남북미 회담장에서 한국, 북한, 미국의 정상들의 만찬에 광우병 한우가 제공된다. 좀비로 변한 전방부대의 병사들이 판문점까지 쳐들어오고, 정이병과 지소위는 대통령을 구하러 판문점까지 들어가게 된다는 스토리이다.
좀비는 이제는 하나의 진부한 클리셰가 되어버렸지만, 이 소설은 개연성을 정교하게 직조하여, 있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만들어 독자로 하여금 실제 현장에서 보는 것 같은 짜릿한 서스펜스를 느끼게 했다는 점에서 아주 잘 짜여진 수작이라 하겠다. 읽는 내내 재미와 스릴을 느꼈다. 표층적으로 보면 그렇다. 미국드라마 워킹 데드나 부산행 같은 좀비 영화와 이 소설이 차별화되는 점은 철저히 개연성과 인과관계로 구성되어 그렇게 이야기가 전개될 수밖에 없음을 독자가 수긍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작가가 매우 고심해서 설계하고 이야기를 치밀하게 구성한 덕분이다.
심층에 숨겨진 또 하나의 메시지
그렇다면 작가가 이 소설로 말하고자 한 또다른 레이어에 숨겨진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모든 소설가가 어떤 사회적, 철학적 메시지를 자기 소설에 숨겨놓거나, 구상할 때 의도적으로 설계하진 않을 것이다. 소설가가 사회적, 정치적,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자 의도해서 소설을 쓰게 된다면 소설의 본원인 재미나 감동이 덜하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어디까지나 이야기꾼이지, 사회학자나 철학자가 아니며, 그러한 메시지를 담아 독자를 가르치려 한다면 그런 불순한 의도를 독자들이 모를 리 없다. 소설가의 의도가 독자에게 읽혀지는 순간, 그 소설은 내러티브로서의 매력을 잃게 되고 독자는 그 소설가의 작품을 외면하게 될 것이므로,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그런 사회적, 철학적, 정치적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담으려 하지 않는다.
고로, 이 소설에 숨겨진 더블 레이어는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작가 역시 초고를 완성하고 나서 퇴고하면서 더블 레이어의 해석 가능성에 눈을 뜨고, 복합적인 의미로 이야기가 해석될 수 있게끔 문장을 다듬었으리라 추정한다. 이것은 작가가 평소 갖고 있던 사회적 문제의식이 무의식적으로 정교하게 투영된 것으로 본다. 이야기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것은 작가의 자유이고 재량이지만, 해석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고 권리다. 나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작가의 무의식이 투영된, 이 소설에 숨겨진 레이어의 메시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인수공통감염병으로 변이된 소해면상뇌증(광우병)은 하나의 예시다. 이 트리거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일어나게 되면, 이 사회에 만연한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에 의해,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번지게 될만큼 이 사회가 취약하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고 본다.
좀비 블랙 코미디
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많은 인재를 겪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 세월호와 무안공항 참사까지. 이 사고들은 막을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과연 무엇이 이 사고들을 일어나게 했고, 또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하고 있는걸까? 이 소설은 독자에게 스스로 질문하게 만든다. 소설가가 직접 의도를 갖고 묻는 게 아니라, 소설가를 통해 완성된 소설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가령 변이광우병이 발생했을 때, 도축장에서 질병검사를 담당하던 검역관들이 정치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 했더라면, 한우농가의 오너들이 엄청난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소들을 폐기 처분하자고 목소리를 냈더라면, 정치권에서 남북미 정상회담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이익을 잠시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변이광우병이 발생했음을 고지하고 정상회담을 연기했더라면, 언론이 정치권의 회유와 압력에 맞서 언론으로서 제 할 일을 다했더라면…이 소설의 말미에서 보여주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혼자 살아보겠다고 치료제로 추정되는 정세정 이병의 다리에서 피를 쭙쭙 빨아먹다 지소위의 총을 맞고 서거하는 웃픈 장면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좀비 블랙 코미디다.
제목 ‘구멍’의 의미
이 소설은 한국 사회의 추악한 단면을 비웃는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소설이 말하듯이 개인과 집단 이기주의에 병들어 있는지 모른다. 여전히 정치권은 정당의 정치적 손익을 국민 전체의 안전과 번영보다 우선시하고, 언론은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개인이 아무리 깨어있는 행동으로 목소리를 낸다고 해도, 집단 이기주의 앞에선 무력할 뿐이다. 소설 속의 연희, 정이병, 지소위와 같은 개인들이 깨어있는 의식으로,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자신의 자리에서 제 목소리를 낼 때, 사회는 더욱 안전해지고 번영할 수 있다는 작가의 무의식적인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나는 읽는다. 물론 이것은 작가가 의도한 바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것은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내멋대로 해석할 권리가 있는 것이므로 나는 그렇게 보려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정세정 이병은 군대에서 가장 낮은 계급에 있는 자이다. 종아리를 좀비에게 물리고도 변하지 않는 것으로, 치료제일 가능성이 보여졌다. 그는 이 광우병 재난에서 유일한 희망이다. 체질상 고기를 먹으면 구토를 하고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태생적인 채식주의자다. 채식주의자는 태생적이든, 신념에 의한 것이든 우리 사회에서는 극소수로 취급된다. 극소수의 목소리가 이 사회를 구원하는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아무리 작고 힘 없는 극소수의 목소리라 하더라도, 집단의 이익,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라는 집단의 폭력으로 억압하는 사회는, 이 소설에서 철저히 개연성과 인과로 직조하여 보여주었듯이, 작은 트리거 하나에도 아주 쉽게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걸 소설은 말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재미있고, 잘 쓰여진 좀비 이야기로 보이지만, 이 소설이 함의하는 숨겨진 코드는 결코 가볍지 않다.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많은 발전이 있었고, 문화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탄탄한 입지를 갖게 되었다. 20년 전, 30년 전에 비하면 정말 대단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소수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집단이기주의의 한계에서 자유로운지 한번 성찰해보자. 만약 이런 상황에서, 변이광우병으로 예시되는 작은 트리거가 적절한 상황과 맞물려 일어난다면 우리 사회는 겉으론 아주 탄탄해보이지만 걷잡을 수 없는 거대한 산불에 무기력하게 타서 잿더미가 되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취약한 사회라는 걸 인정해야한다. 그게 이 소설의 제목인 ‘구멍’의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그 구멍을 다 막지 못했다. 여기 저기 뚫린 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또다시 이태원과 무안공항의 비극이 반복되고 어느 바다에선 여객선이 침몰할 것이며 대교와 백화점이 무너져내릴 것이다. 좀비광우병은 그 모든 비극에 대한 은유다. 그 구멍을 제대로 막지 않는 한, 치밀하게 돌아가는 인과에 법칙에 의해 그리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숨겨진 메시지로 이 소설은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