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제목은 묘하게 중의적이다. 착즙의 대상이 명확지 않다. ‘프로파간다’에서 백합을 착즙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프로파간다에서 ‘백합’을 착즙(착취, 내지는 박해)한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전자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는 화자인 ‘나’가 이데올로기에 빠진 꼬마 부치를 꾀어내 레즈비언의 세계로 불러들였다는 내용이 된다. 이 경우 주체는 제목에 드러나지 않은 ‘나’가 된다.1 그러나 후자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모종의 페미니즘 집단이 실제 레즈비언들을 배격하고 그들의 정체성만을 교묘히 베껴내어 프로파간다에 이용한다는 내용이 된다. 이 경우 주체는 프로파간다 그 자체다.2
소설을 모두 읽었다면 두 의미 중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지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는 크게 문제가 없다는 사실에 독자들은 쉽게 동의할 것이다. 실제로 소설은 양자의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이해를 떠나 소설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큰 차이가 발생한다. ‘나’가 주체가 되는 소설은 따듯한 로맨스지만 ‘프로파간다’가 주체가 되는 소설은 차갑고 딱딱한 비판적 소설이 된다. 고발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이 차이성은 작가가 작품 내에서 꾸준히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스스로 주체가 되기를 포기하고 프로파간다의 부품으로서 기능하기를 택한 인간은 타인에 대한 혐오와 폭력에 놀랍도록 둔감해진다. 심지어 개개인의 정체성과 의식을 사멸하고 집단의 사고방식에 완전히 동일시될 것까지 요구한다. 작품 속에서도 꼬마 부치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있는 동안엔 ‘나’와 사랑을 나누는 온전한 인간이었지만 특정 이데올로기의 프로파간다로 사역당 할 것을 강요받는 순간엔 사랑을 상실한, 이데올로기의 병사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화장과 치마라는 코르셋 속에 억압받던 과거의 모습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코르셋을 벗어나 갑옷 속에 갇힌 것이다.
이처럼 작품은 제목서부터 느껴지는 중의성으로 ‘나’와 ‘프로파간다’의 경계를 자유롭게 유영하며 주제의식에 대한 단서를 던져준다. 소설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읽어갔던 것처럼 우리 또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동안 ‘나’와 ‘프로파간다(선전도구)’ 사이를 끝없이 헤매야 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면서.3
존재는 무수히 많은 정체성으로 뭉쳐 있는 일종의 집합체다. 우리는 특정한 성별에 속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연인이고 자녀이며 친구가 된다. 이 유기적인 관계는 하나의 정체성에 종속되지 않고 오직 서로에 대한 감정으로 쌓아 올려진다. 이 관계에 프로파간다는 필요치 않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그것을 우선하기 시작하면 존재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종속되어 버린다. 나, 아니면 당신. 우리 아니면 타자로 존재를 규정하며 그 규정은 존재 자체를 단 하나의 정체성과 관념에 붙박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나’와 꼬마 부치가 처음 레즈비언 바에서 만나 나누는 대화는 이런 맥락을 아주 잘 보여준다.
“레즈비언은 남자가 필요 없는 존재잖아요,”
“일단 레즈비언을 정의하는 데 남자가 왜 들어가. 이거 쓴 사람이 아직도 남자에 연연한다는 건 아주 잘 알겠네.”
“남자를 싫어하는 게 곧 여성들 간의 연대이자 자매애죠.”
“적의 적이 항상 아군이라는 법이 있대?”
같은 여성임에도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나’를 꼬마 부치는 탐탁잖게 여긴다. 더 나아가 ‘나’의 차림새와 행동에 사사건건 간섭하기에 이른다. 긴 생머리와 치마를 지적하고, 백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꼬마 부치의 언행 밑바닥에는 모든 여성이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며 그에 대항하기 위해 자매애 가득한 페미니즘으로 뭉쳐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작동하고 있다. ‘나’가 “적의 적이 항상 아군”이 아니라고 꼬집었듯이 이는 명백한 흑백논리다. 레즈비언이 되어 남자가 필요 없어진 것이 아닌, 남자가 필요 없어야기에 레즈비언이 되었다는 괴상한 인과오류는 덤이다.
내친김에 ‘백합’이라는 단어에 대한 언쟁도 짚고 넘어가야겠다.
“일본에서는 ‘사회인 백합 엔솔로지’며 ‘레즈비언 업소 백합 엔솔로지’ 같은 것도 나오는데, 네 눈에는 이게 순결해 보이니?”
“남덕들이 그렇게 말하잖아요. 여자끼리는 좆이 없으니까 결국 섹스해 봤자 처녀막은 유지되고, 그러니까 순결한 거라고!”
‘나’와 같은 레즈비언들에게 ‘백합’이라는 단어는 이미 일상적이다. 그것은 동성애를 의미하는 평범한 단어에 불과하다. 순결을 의미하는 백합은 동음이의어로 치부된 지 오래다. 설사 동성애를 의미하는 백합이 순결에서 파생되었다 하더라도 ‘퀴어’라는 단어의 사례가 있듯이 어원은 그저 어원에 불과하다. 사회가 소수자를 어떻게 규정하든 간에 당사자가 그것을 내면화하고 당당히 받아들인다면 언어는 매 순간 그 기의를 갱신하며 우리의 곁에 남는다. 퀴어는 비록 혐오와 차별의 의미로 생성되었지만, 오늘날의 그 의미는 어떠한가. 혐오에 저항하는 성소수자들의 정신을 보여줌에 있어 그보다 더 값진 단어는 없다.
그러나 성 소수자의 문화에 무지한 꼬마 부치는 순결의 의미에만 과하게 집착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남덕’들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당사자들의 합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회적 합의’를 운운하며 백합이란 단어에 부정적 인식을 채워 넣기 바쁘다. 애초에 꼬마 부치가 몸담은 집단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에 대항하기 위해 뭉쳐졌으므로 남성의 시각에 우선하여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위에서 언급된 ‘나’의 말, ‘아직도 남성에 연연한다~’는 비판은 여기서도 유효하다.
‘나’와 꼬마 부치는 모두 사회의 제도로부터 가해당한 경험이 존재한다. 일례로 꼬마 부치가 대학 신입생 시절 만났던 복학생은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표본이다. 화장과 긴 머리를 강요하는 그 모습에서 알 수 있듯 복학생 남성은 꼬마 부치를 자신이 몸담은 사회의 기준에 맞추려 노력했다. 그러나 꼬마 부치에게 화장을 강요했던 이가 오직 복학생만은 아니었다.
“저 고등학생 때는 어쩔 수 없이 머리 기르고 치마 입었거든요. 안 그러면 바로 아싸 되니까. 찌질한 애로 보이기 싫었어요.”
아, 그래서 그렇게 탈코 노래를 불렀나. 나는 학원 강사로 일하는 친구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 고등학교 때랑은 정말 달라. 여자애들 다 기본적으로 화장하고 다녀. 시험 기간에도 쌩얼 보이기 싫다면서 마스크 쓰고 다니는 애들도 있고.
고등학생 시절, 집단에서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꾸밈 노동에 참여했지만, 이는 자발적이라기보단 강요된 것에 가까웠다. 또래 학생 사이에서 강요된 화장과 치마는 복학생 남성의 강요와 내용 면에서 동일하지만, 그 주체가 가부장제 남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의문을 자아낸다. 물론 고등학생 사이에서 도는 꾸밈 노동 또한 가부장제에서 파생되었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레즈비언의 성 정체성을 가진 ‘나’처럼 여성을 위해 화장과 치마를 입는 여성 또한 존재한다는 점에서 여성의 꾸밈이 오직 남성에 의한 것이라는 시각이야말로 또 다른 차별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설사 고등학생 또래 집단의 꾸밈 강요가 가부장제에서 파생된 것이라 하더라도 학생들이 스스로 그 이데올로기의 병사가 되기를 자처하고 다른 학생들에게 이를 강요했다는 점에서 여성 또한 가해의 주체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여성이 가부장제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나’의 예전 애인인 ‘가부장제 부치’를 통해서 소설 내에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폭력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을까. 꼬마 부치는 탈 코르셋을 통한 전 여성의 꾸밈 노동 해방이 그 해답이라고 믿었다. 이 때문에 ‘나’의 화장과 치마를 지적하고 이상적인 남성성을 가진 GL 그림체를 통해 기준값을 재정립하려 하는 극단적 페미니즘의 주장에 몸을 실은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또 다른 방식의 폭력이라는 점을 꼬마 부치는 몰랐다.
그새 세상이 그렇게나 변했나. 우리 때는 애초에 교칙부터가 화장을 금지했다. 그놈의 ‘학생답게’라는 말은 또 얼마나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는지. 조금은 꼬마 부치의 심정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외되지 않기 위해 화장과 짧은 치마를 입어야만 했던 꼬마 부치의 학창시절은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회상되어 폭력을 실감하게 한다. 강제로 두발을 단속하고, 치마의 길이를 재고, 조금의 화장기도 용납하지 않던, ‘학생다움’이라는 사회적 기준에 일치할 것을 강요했던 오래전의 학교를 통해 ‘나’는 그 삭막한 학창시절을 이해한다. 어찌 보면 정 반대편에 서 있는 듯 보이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개인의 정체성을 사멸하고 집단의 기준에 맞출 것을 강제한다는 점에서 두 행위는 놀랍도록 똑같다.
꼬마 부치는 꾸밈을 원치 않는 여성이고, ‘나’는 꾸밈에 거부감이 없는 여성이다. 꼬마 부치에게 화장을 강요했던 복학생은 가부장제의 남성이었지만, 고등학교의 또래 집단은 가부장제와 거리가 먼, 여성이 포함된 복합적인 집단이었다. ‘나’에게 꾸밈을 허락하지 않았던 학생부는 권위주의적 사회의 일부였고 오늘날 ‘나’의 꾸밈에 간섭하는 것은 탈코르셋 운동을 지향하는 여성 꼬마 부치다. 이렇게 얽히고설킨 이데올로기의 홍수 속에서 사회초년생인 꼬마 부치가 논리적 모순을 품은 체 방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에게 가해지는 어두움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때문에 불쾌감을 느낀 집단의 반대편으로 가 그들에게 동조하며 무기한 투쟁을 벌이는 행위는 무의미하다. 우리에게 드리우는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선 반드시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나’는 이미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경험했고 그로부터 탈구한 경험이 있는 존재다. ‘나’의 방에 남아 있는 페미니즘 서적, 오드리 로드의 ‘시스터 아웃사이더’가 이를 증명한다.
흑인, 레즈비언, 페니미스트로 살아가는 삶은 어떠할까. 앞서 언급했듯이 존재는 수많은 정체성으로 이뤄진 집합체다. 이를 여성, 혹은 페미니스트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드리 로드의 정체성은 흑인과 백인 페미니스트 집단에서 동일하게 부정당했고 그 때문에 오드리 로드는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정체성에 포함될 수는 있지만,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정의할 수 없다.
이데올로기에 정의되려 노력하는 꼬마 부치의 행동은 결국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서사가 진행되는 내내 점차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연대를 위해 ‘레즈비언’은 되었지만, 성 정체성을 몰라 진짜 레즈비언인 ‘나’의 유혹 앞에서 당황하는 모습이 그러하고, 자수정을 좋아하면서도 탈 코르셋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요구에 가로막혀 가판대 앞을 서성이는 모습이 그러하다. ‘나’에 의해 던져진 일련의 시험들은 꼬마 부치의 가치관을 뒤흔들기에 충분했고 이 혼란은 H의 등장으로 인해 이데올로기와 ‘나’ 사이를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면서 극대화된다.
이때 꼬마 부치를 끌어당기기 위해 ‘나’와 H가 건네는 말들은 각각 6장과 7장의 제목을 통해 차이가 드러난다. H는 이 순간마저도 이념을 묻는다.
“페미니즘인지, 퀴어인지 둘 중 하나만 선택해. 확실히 하란 말이야.”
꼬마 부치의 연애가 사회운동이 아니었음에도 H는 ‘나’를 선택한다면 자신들의 집단에 남을 수 없다고 경고한다. 페미니즘이 퀴어를 끌어안지 못할 이유는 없다. 성애를 배척해야 페미니즘에 남을 수 있다면 이는 배타적 논리다.4
그에 반해 ‘나’는 감정을 묻는다.
“이제 슬슬 알 때도 되지 않았어?”
연대와 성애 중 하나만 택하라는 ‘나’의 태도는 양자택일이라는 점에서 H와 같지만, 퀴어가 페미니즘을 끌어안지 못한다는 배타적 논리는 결코 아니다. 감정과 이념을 선택하는 것은 별개의 종류다. ‘나’는 연대와 성애가 양립 가능하다는 의견을 소설 말미에 넌지시 밝혔다. 이 순간 ‘나’의 물음은 연대의 페미니즘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나’와의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를 묻는 것으로 G의 지적처럼 가짜 페미니즘 놀음을 끝내려는 시도로 해석해야 옳다.
이 두 상충 되는 견해 사이에서 ‘꼬마 부치’가 감정에 의해 ‘나’를 택하는 부분은 ‘프로파간다에서 백합 착즙하기’가 로맨스 소설로서 갖는 미덕을 아주 잘 보여준다. 관계는 이념에 종속되지 않는다. 오로지 감정에 의해 맺어지고 끊어질 뿐. 단적으로 H와 꼬마 부치 사이의 관계가 끊어지는 장면은 혐오의 정서가 넘쳐난다.
“그 여자가 널 망친 거야. 넌 여태까지 멀쩡히 살았는데 그 여자 때문에 물든 거라고!”
“왜 퀴어 문제를 우선하는 건데? 지금 여성 문제가 더 시급한 거 몰라?”
“너희들은 결국 게이 시녀질이나 하는 거잖아. 여성한테 힘을 실어줘도 모자랄 판에 왜 퀴어 편을 들어?”
“너 요새 ‘보빔물’같은 거 잘만 보더라? 그게 그렇게 좋았어?”
“그딴 거나 보니까 성적 취향이 이상해지는 거지! 그 더러운 년 때문에!”
자나 깨나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이들이었지만 놀랍게도 이 장면에 논리는 없다. 편 가르기와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만이 가득할 뿐. 이 말들은 모두 한때 꼬마 부치의 정체성을 지탱하던 것이었고 그녀가 재생산하는 프로파간다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 국면에서 이 프로파간다는 꼬마 부치 자신을 공격하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온다. 꼬마 부치는 오래전 오드리 로드처럼, 자기 자신을 스스로 정의해야 할 필요성을 겨우 느낀다. 그리고 꼬마 부치가 이 장면에서 선택한 정체성은 여성도, 페미니스트도, 퀴어도 아닌 ‘나’의 연인이었다.
“언니는 그런 말 들을 사람 아니야. 그 띠위 저질스런 말 하지 마!”
인간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 그렇기에 무수히 많은 사람만큼 무수히 많은 주체가 있다는 것. 이를 깨달은 꼬마 부치가 프로파간다에서 벗어나 여성도 퀴어도 아닌 ‘언니’를 말하며 싸우는 모습은 결말 부분의 고백보다도 더 많은 가슴의 울림을 전달한다. 자신을 재정의하고 ‘나’를 온전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꼬마 부치에게 이제 이데올로기나 프로파간다는 필요치 않다. 뻗은 ‘나’의 손을 붙잡고 못된 말이 가득한 골목을 탈출한다.
다시 돌아온 레즈비언 바에는 사상에 젖어 대상을 마음대로 규정하는 ‘집단주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를 위한 연대가 아닌 감정으로 맺어지는 관계의 연대가 두 사람에게 등장한 것이다. 대상을 성별이나 빈부, 국적이나 성 정체성으로 규정하지 않고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하다.
그렇기에 오직 사랑으로 연대한다면, 프로파간다 혹은 혐오적 투쟁이 아닌 사랑으로 연대할 수 있다면 ‘나’와 꼬마 부치가 그랬듯 당신과 내가 이데올로기의 홍수 속에서 침몰하지 않고 온전한 한 명의 주체로서 이 험난한 세계를 건널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글 끝에 사족을 달자면, 꼬마 부치가 어렸을 적 자수정을 골목 대장에게 뺏겨 깨트렸다는 기억은 매우 중요한 암시처럼 언급되었지만 개인적으론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이 되어 함부로 본문에 달지는 못했음을 알린다. 대신 Brandi Carlile의 노래 가사 [tell you that your place is in the middle, when they hate the way you shine]을 인용하여 감상을 대신하겠다. 동시에 이 글을 인상 깊게 읽은 독자에게 박민정의 소설 ‘세실-주희’와 최은영의 소설 ‘그 여름’을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