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 거미의 집멸도(集滅道) 비평 브릿G추천

대상작품: 인간 불신 (작가: , 작품정보)
리뷰어: 이두영, 19년 5월, 조회 181

In.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작품 특유의 분위기가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장악한다. 이 특유의 분위기를 한 단어로 고르라면, 나는 ‘광기’라는 말을 택하고 싶다. 어느날 사라진 히스클리프는 한참의 세월 뒤 돌아와서는 언쇼 집안을 박살내 버리고, 아주 풍비박산을 내버리고, 그리고 그 박살난 집안의 딸 캐서린에게 이렇게 말한다 – 나는 널 사랑한다고.

한술 더 떠서 캐서린은 말한다 – 나도 사랑한다고. 점입가경이라고 해야할까, 화룡점점이라고 해야할까, 캐서린은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한 상태. 한놈은 말로는 사랑한다면서 그 사람의 집안을 부셔버리고, 한놈은 집안을 박살낸 망나니 같은 녀석더러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둘은 서로를 껴안고 키스한다.

‘사랑한다, 죽여버리고 싶을만큼.’ : 이 말을 어디서 처음 들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내가 중학생이던 즈음 정도였을 거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감정 표현을 과장해도 적당히 할 것이지 해도해도 터무니 없는 과장이라는 생각에 속으로 은근히 실소했다.

역시 언제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저 표현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내가 인간의 어느 한 정서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 그 정서를 한 단어로 말하라면, 광기. 사실, 지금도 그런 편이지만, 나는 예전부터 광기라는 표현 또한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과장과 허풍이 많이 들어간 단어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러나 이젠 <폭풍의 언덕>을 설명할 수 있는 딱 하나의 단어가 광기라고, 수긍한다. 그리고 이 광기는 집착에서 발생한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 불신>은 광기의 작품이다 – 집착이라는 광기.

태그로 #피폐물 이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읽는 내내 작품에 흐르는 광기 어린 공기 – 피폐함에 다소 불편한 피로 또한 느꼈기에.


Main. ‘이야기의 전개’와 ‘장면의 분위기 형성’ – 추리소설의 등장인물 갑, 을, 병

내가 이 작품을 어쩌다가 읽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모호하다. 아무튼 어쩌다보니 읽기 시작했고, 완독했다. 우선 끝까지 읽게 만들었다는 사실부터 간단히 말하는 게 왠지 순서일 것 같다.

리뷰를 감상으로 올릴지 비평으로 올릴지 고민했다. 감상으로 적자니 분석적인 이야기가 포함되고, 비평으로 적자니 독자로서 내 소감이 상당 부분 차지할 것이 예상되어서. 다만 분석의 측면이든 소감의 측면이든 이 글에 내가 아쉬움이 남는다는 점, 이 점은 분명하다.

여기 추리소설 하나를 상상해보자. 사건이 발생했다. 등장인물로 갑, 을, 병이 있다. 사건의 범인은 누구일까, 하고 보니 용의자는 갑과 을, 둘 중에 하나일 것으로 좁혀진다. 그러다가 알고보니 범인은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니며 사실은 병이 모든 사건의 범인이었다고 밝혀진다.

그런데 독자는 별로 놀라워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독자가 읽기에, 갑이 범인이라고 하기에도 엉성하고 을이 범인이라고 하기에도 엉성해서, 병이 범인일 거라는 생각을 쉬이 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병이 범인이었다는 게 밝혀지는 과정이 ‘그냥 병이 범인이다’라고 툭, 튀어나오는 식이라, 독자가 느끼기에는 허탈하거나 황당하거나 했기 때문이다.

<인간 불신>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이 이러하다. 그래서 아쉽다.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은 가급적 언급하길 피하는 편이지만, 중반을 넘어 후반에 들어서면서 재벌가 따님으로 등장하는 캐릭터가 특히 그렇다. 전형적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 재벌가 따님이 무언가를 드러내는 회차의 경우, 장면 표현의 수위는 상당히 노골적인 반면, 그 노골적인 장면을 보여주기 위한 이야기 전개는 취약하다. 장면의 수위와 선정성이 높다고 해서 감상의 여운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 이 부분은 꼭 언급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수위 높은 장면이 그 장면의 등장 이유를 튼튼하게 해놓지 않을 경우 작가는 공격 당할 위험이 높아진다. 독자로서 내가 이 작품에 느낀 불편함은 단지 피폐한 정서 때문이 아니라, 그 피폐한 정서를 쌓아올리기 위해 마땅히 튼튼해야 할 이야기 전개의 당위성이 취약하여, 자칫 위험할 수 있겠다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높은 수위의 장면들은 이 작품에 분명히 일조한다. 작품에 흐르는 공기, 그 공기의 정서를 형성하는 데에는 분명히 작용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이 더 큰 걸까. 보통의 나였다면 전개의 과정에 의문을 품으며 읽다가 말았을 것 같은데, 나는 전개에 아쉬움을 느끼면서도 읽기는 끝까지 읽었다. 즉, 이 작품은 독자로서의 나를 흡입하는 힘은 분명히 있었던 셈이다.

단지 수위 높은 장면들 때문에?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 그대로 ‘장면’들 때문이다.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구조적으로 취약하다고 느낀 한편, 작품 곳곳에 기술된 풍경, 감상, 그리고 이를 통한 내면 사색 등의 장면들은 분위기 형성에 상당히 공헌했으며, 내가 이 글을 끝까지 읽게 한 흡입력이 바로 이 분위기 형성이었다. 그리고 결말을 읽으며 이 작품의 목표가 바로 이 ‘결말’이었구나, 하고 느꼈다.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설득력 없이 느껴지는 경우도 심심찮게 나타나는데, 이 또한 이야기 전개의 논거가 튼튼하지 못한 점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한 재벌가 따님이 그 정도가 제일 심했을 뿐, 여타 등장인물들도 크고 작은 결함들이 눈에 띠었다.

허나, 풍경과 내면 사색으로 그려지는 장면들이 작품의 핵심 테마 – 주인공 A와 B의 ‘집착’을 형성하는 것 또한 선명하게 보인다. 아슬아슬한 수위의 장면들이 조절되고 이야기 전개가 튼튼하게 다듬어진다면 좋겠다, 라고 정리한다.


Out. 집멸도(集滅道)의 완성을 기대하며

석가모니 인생의 고통 집착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고통을 없애려면-멸하려면, 집착을 없애야-멸해야 한다고 하였다. 고집멸도(苦集滅道), 집착을 소멸시켜 고통을 없애버리는 도,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인간 불신>은 주인공이 고통을 해소하는 길, 다시말해 집착을 내려놓는 길, 즉 ‘집멸도(集滅道)’의 길을 걸어가는 과정, 그것을 그린 작품이다. A와 B라는, 이름이 정해지지 않은 두 주인공이 서로 나비가 되기도 하고 거미가 되기도 하면서 연주하는, 집멸도의 과정. 정서를 자아내는 데에는 충분히 성공했다고, 그렇게 보고싶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전개는 투박했다. 투박한 전개로 말미암아 수위 높은 장면들이 설득력 있게 전달되기 보다는 위험하게 전달된 느낌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작품 속의 인물은 집멸도의 길을 걸어갔으나, 작품이 집멸도의 과정을 효과적으로 그리는 데에 다소 덜 다듬어졌다고.

집착과 고통,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비로소 해방되는 이야기, 이 테마는 매력적이다. 개인적인 소망이랄까, 이 매력적인 테마가 더 섬세하게 다듬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느꼈다. 그것이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바위를 섬세하게 조탁하는 조각가처럼, 작가가 섬세하게 글을 더 다듬을 수 있는 경지로 올라선다면, 집멸도의 과정, 그것이 더 잘 완성되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희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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