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운 과거가 너를 규정하지는 않아. 넌 잘할 수 있어.”
(본문.49-P78)
목차
1.『한반도 북단을 바라보는 창작자들….』
2.『작가님이 그리고 싶은 북한은 어떤 세상인가요?』
3.『정보만 남은 이야기들』
4.『어울리지 않는 재료들을 냄비에 담아』
5.『뜻을 덜어내고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면.』
<본 리뷰는 “앰버향”님으로부터 의뢰를 받아서 작성한 리뷰입니다.>
1.『한반도 북단을 바라보는 창작자들….』
현재 한반도 사정을 고려할 때, ‘북한’이라는 배경이 주는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그 현실적으로 관측할 수 있는 장소 중에 이만큼 이질적인 공간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와 같은 언어, 같은 모습을 가진 주민들이 살고 있음에도, 문화 혹은 사상적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은 그들과 거리를 두게 만들며, 전 세계를 둘러봐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 군주제에 가까운 형태로 운영되는 정치현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폐쇄성까지 고려한다면, 그야말로 오지나 다름없는 무언가처럼 비춰집니다.
이번에 읽은 작가님의 <북녘에서 이계의 악마를 깨우다>라는 작품 또한 이런 ‘북한’이라는 배경에서 오는 특유의 신비함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는 소설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악마와 빙의 같은 오컬트적인 소재와 더불어, 퀴어에 근반하고 있는 여주인공, 기밀로 붙여진 산골마을의 수상한 연구, 심지어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한반도의 정치적 격동까지…. 그 하나하나가 작품의 중심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소재들을 한 데 어우르는 플롯을 제시하며, 주제와 장르적 재미를 모두 잡으려는 놀라운 시도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저로서는 그런 실험적인 플롯이 성공적이었다거나, 이 소설이 완벽하다고 단언하며 다른 독자들의 감상을 해치고 싶지 않습니다. 제 개인에게 이 작품은 마치 처음 연필을 쥐기 시작한 학생처럼 의욕이 넘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의욕만으로 끌어 담을 수 없는 이야기의 한계를 동시에 느낀 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백하자면, 처음 정독 과정에서는 소설 그 자체에서 문제점을 느끼면서도, 그 문제점이 왜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 고민해보게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작가님이 리뷰를 의뢰해주시고, 피드백에 대한 질문을 요청하시고, 본인이 직접 퇴고하는 과정을 보여주시는 과정을 함께하며, 비로소 이 작품이 더 발전할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해볼 수 있게 되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는 점도 함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에서는 <북녘에서 이계의 악마를 깨우다>라는 작품에 던진 문제점들을 알아보고, 이 작품이 하나의 명작으로 뼈를 내보일 수 있는 과정을 함께 찾아보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2.『작가님이 그리고 싶은 북한은 어떤 세상인가요?』
앞서 말했듯이, 북한이라는 배경은 한국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 기묘한 세상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와 언어가 같고, 모습이 같지만, 막상 모든 것들을 건너들을 수밖에 없는 폐쇄성과 더불어, 그 안에서 발견되는 구시대적인 가치관들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꺼림칙함과 신비함을 동시에 전해주죠.
물론 ‘북한’은 물리적으로 가까운 장소입니다. 하지만 그 가깝다는 개념이 무색하게, 그 누구도 갈 수 없는 ‘오지’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이런 공간을 창작물로 가져오겠다면, 다음과 같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첫째, 사실을 근반으로 한 철저한 조사가 동반되어야 한다.
둘째, 만일 정보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이상의 창작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한 마디로, 이런 현실적인 공간을 다룰 때는 현실과 극히 밀접하거나, 혹은 현실과 창작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상상력을 발휘해야한다는 의미겠습니다.
그렇다면 <북녘에서 이계의 악마를 깨우다>라는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북한은 어디에 속하고 있나요?
작중에서 그리고 있는 ‘북한’은 통일한국의 단면으로 등장합니다. 주인공 ‘예나’와 ‘향미’가 살고 있는 세상은 10년 전의 격동으로 남한주도의 통일이 성공한 배경을 근반으로 하고 있으며, 차를 타고 평양에 관광을 갈 수 있을 정도로 개방된 사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도입부에서 벌어지는 모종의 사건으로 주인공들은 조금 다른 형태로 통일된 ‘한반도’를 마주하게 됩니다만, 이것은 철저한 반전으로 준비되어 있는 만큼 초반부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편입니다.
이 작품에서 무기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이 ‘북한’이라는 배경입니다. ‘북한’이라는 배경 하에 주인공들은 언어가 통하는 인물들을 주위에 둘 수 있으면서, 그 배경 자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과 무척 동떨어져 있는 마을을 개연성 있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북한’을 소재로 가져와 묘사하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앞서 저는 현실에 있는 공간을 창작물로 가져올 때는 ‘철저한 조사’ 혹은 ‘창작자의 해석’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는 북한을 묘사하고 있는 방식은 어느 쪽에 속하냐고 묻는다면, 안타깝게도 그 어느 쪽도 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작품에서 ‘북한’을 다루는 방식은 무척 관념에 근반하고 있습니다. 어떤 현실적인 지식을 근반으로 한 배경적 묘사가 아닌, 우리가 막연히 ‘북한’이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요소들을 해석 없이 가져오고 있다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어미가 ‘∼네다’로 끝나는 북한식 사투리, 산골짜기에 비루한 삶을 영유하고 있는 주민들, 여행증을 비롯한 북한식 통행과정까지……. 사실 이런 요소들은 굳이 북한에 대해서 깊게 조사하지 않더라도, 각종 미디어를 통해 희화화되며 접할 수 있는 요소들에 가깝습니다. 즉, 이 작품에서 ‘북한’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부분의 요소들이, 북한 그 자체라기보다는 남한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편견에 가깝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물론 작중의 배경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북한과 다릅니다. 모종의 이유로 통일된 한반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남한에 흡수 통일 된 북한과, 남한을 무력 통일한 북한을 양면으로 묘사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이 작품에서 그리는 북한은 현실적인 공간이 아닌, 창작자가 여느 가정을 두고 해석과 상상을 곁들인 배경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작품에서 그 상상적 배경을 다루는 방식은 사뭇 의아합니다. 분명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북한을 그려내려고 시도하지만, 그 모습은 우리가 현실에서 건너건너로 들을 수 있는 북한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통일 이후에 나타나는 문제 또한 갑작스러운 한반도 정세 변화로 인한 주변국의 우려, 소득 불균형, 북한 토착민의 폭동 등, 굳이 남북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정해볼 수 있을 법한 일들로만 채워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상상에 의한 배경을 제시하는 것에 비해, 상상이 발휘되는 구간은 전혀 없다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시공간을 느끼기 어렵다는 비판을 수용하기 어렵다’며 제게 의아함을 드러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주인공이 있는 장소가 조금 다른 세상의 북한이라는 것’에 대해 궁금증을 가져야함에도, 독자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 하는 이유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취지였죠.
그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북한이 시공간을 구분해서 생각할 정도로 깊은 해석이 없기 때문입니다. 굳이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는 북한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가게 될 거라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북한’이든 ‘통일한반도’든 사실상 우리로서는 상상의 영역에 불과함에도, 이 작품에서는 거의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 모든 것들을 ‘북한’이라는 공간에서 떠오르는 일차원적인 관념으로 뭉개며 현재 남한에서 그리고 있는 북한의 편견을 반복한다는 인상에 가깝게마저 느껴지죠. 작가님은 ‘다른 세상이니 배경을 느끼지 못 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하셨지만, 사실 독자 입장에서는 ‘북한이든 통일한반도든 지식이 없는 우리에게는 이 배경이 다른 세상인지조차 구분이 안 된다’ 정도의 의미가 맞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평화통일 된 북한’과 ‘무력통일 된 북한’을 구분할 수 있을 만한 전문적인 해석이 동반되어야 하는데, 작중에서는 그런 시도들이 거의 없는 편입니다. 그저 문명에서 퇴화한 듯한 어느 산골마을을 제시하며 조금 다른 ‘북한’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만, 냉정히 말하자면 그 공간조차 북한보다는 사투리가 특이한 남한의 시골마을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질감을 느끼기는 어려운 편입니다. 즉, ‘진짜 북한의 생활은 어떤가?’에 대한 고찰이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하죠.
사실 그런 배경적인 설정에도 설득력이 부족한 편입니다. 무력통일이든 평화통일이든 결국 한반도가 통합되었다면 격정적인 변화가 있어야 마땅한데, 그저 입구를 틀어막고 ‘남조선에서 오셨으면 통행증을 내라’며 한가롭게 요청하는 군인의 모습은 지금 한반도가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느끼기조차 어렵습니다. ‘평화통일 된 한반도’ 쪽을 살펴봐도 ‘반란이 벌어져서 김정은이 암살되고 10년 만에 통합정부가 세워졌다’는 설정은 반란 하나를 막기 위해 모든 군사력을 끌어모으고 있는 기형적인 북한 사회를 생각하면 거의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남한의 경제력이 좋다고 한들, 낙후된 북한을 통합하고, 심지어 수령암살이라는 격동에 혼란을 겪고 있는 나라를 10년 만에 수습한다는 것 또한 공상에 가깝습니다.
물론 다른 세계에서 벌어진 ‘대만을 구하기 위해 주한미군을 빼갔다가 중국의 도움을 받은 북한에게 무력통일 당했다’는 배경도 거의 종북주의자들이 할 법한 망상으로 허황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만일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이미 한반도는 NATO 연합군을 비롯한 온갖 군들이 집결되어 한창 전쟁을 겪고 있을 것이며, 설령 북한이 괴력을 발휘해 미군과 연합군을 전부 무찌르는 데 성공했더라도 힘을 빌렸던 중국에게 보란 듯이 흡수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결코 10년 만에 수습할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현실을 그대로 묘사한 정치 소설을 쓰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현실성이 부족하다고 단정 짓기 이전에, 그 현실성을 구축하려는 시도 자체가 너무 부족합니다. 기본적으로 남북한의 통일과 한반도의 변화라는 상당히 거대한 배경을 다루면서도 그 안에 담겨 있는 묘사와 지식들은 토대가 부족하며, 작가님이 현실적인 설득을 시도하기 위해 삽입한 대부분의 배경설정들은 오히려 현실성을 해치거나, 말 그대로 설정만 있는 수준으로 작중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현실에 없는 배경인데 상상으로 구현한 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북한’이라는 현실적인 배경을 가져와놓고 설득력이 부족한 묘사를 허구니까 괜찮다고 치부하는 건 너무 편리한 변명이 아닐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만약 작가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이 ‘북한’이라는 배경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말 심도 깊은 조사를 통해 북한 사회를 구현해내거나, 그를 통해 ‘통일 된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고찰을 제시해야합니다. 지금 이 작품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든 사회현상들은 문장으로 제시된 정보일 뿐, 작품에 표현된 묘사는 아닙니다. 쓰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는 말을 관습적으로 쓰곤 합니다. 그 지점을 구현하기 여의치 않다면, 이 작품에서 ‘북한’과 관련된 것은 전부 제거하는 쪽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3.『정보만 남은 이야기들』
앞선 문단에서는 이 작품이 ‘통일북한’이라는 배경을 제시했음에도 그 힘이 부족했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만, 사실 소설을 읽다보면 ‘북한’이라는 배경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 일행은 모종의 이유로 오지나 다름없는 산골마을로 떨어지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음모를 파헤친다는 전형적인 스릴러, 호러, 미스터리물의 형식을 따라가기 때문이죠. 그 과정에서 북한이라는 요소는 거의 주민들의 말투로만 등장하는 편입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첫인상이 무척 좋았던 편에 속합니다. 공황에 빠진 와중에 다다른 낯선 마을, 그곳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살인사건, 그리고 발견하게 되는 초자연적인 존재 등……. 요소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그럴 듯한 포크호러를 충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편견으로 무작정 적대감만을 표하는 주민들, 그냥 사람이 좋아서 호의를 베푸는 반장님, 지나칠 수 없다는 막연한 이유로 살인사건의 뒤를 조사하는 주인공, 차원의 균열이며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문 같은 현실에서 쓰이기 힘든 용어로 아무렇지도 않게 현상을 정의하는 북한사람, 부모님이 간첩이라고 잡혀갔는데 딸은 멀쩡하게 학교를 다녔다는 과거 등 개연성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개연성을 하나하나 지적하자니 소설이 전체적으로 인과가 편리하게 흘러가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을 고쳐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애초에 개연성을 따지기 시작하면, 이제 얼굴 처음 본 예나와 수호가 그 어떤 계기도 없이 협력하고 신뢰를 쌓는 것조차 어색한 게 사실이니까요.
단편적으로 살펴보면, 이 작품이 ‘호러(horro)’의 향취를 내는 구절은 눈여겨볼 장면들이 제법 존재했습니다. 마을에서 눈에 띄는 아이들의 유령은 그 존재를 발견하고 놓치는 장면들이 감각적으로 연결되고 있으며, 녹음 된 음성을 통해 당시 내용을 파악하는 장면들은 한 걸음 떨어져서 엿보는 것이 중요한 호러의 공식을 충분히 재현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세세하게 들어가면 그 자체의 이미지는 좋지만 소설로 정제되지 못 한 문체 탓에 너무 설명적으로만 다가오는 감이 있지만, 어쨌든 작가님에게 그런 장르적 재미를 찾을 수 있는 감각이 존재한다는 것은 커다란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인상적인 장면들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뒷면을 파헤치기 시작하는 순간, 장르적 재미가 한 풀 꺾이는 인상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장면이 시간적으로 교차되는 부분에 신경을 썼다’ 그리고 ‘스릴러적 재미와 구조를 잘 살펴봤으면 한다’라고 요청하셨습니다만, 저로서는 예나가 향미와 헤어지고 난 뒤 이어지는 과거사들은 전부 불필요한 무언가라고 느꼈습니다.
일단 작가님이 걱정하셨던 ‘시간대가 오가면서 집중력이 떨어지는 듯하다’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저로서는 느끼지 못 한 문제점이었습니다. 작품의 구성이야 과거와 현재가 연속으로 교차되고 있지만, 향미가 빙의 되어 도망가고 연구소를 찾아내기까지를 보여주는 현재의 이야기는 거의 비어 있다시피 느껴지는 탓에, 오히려 그런 과거사들이 몰입을 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만 이런 구성이 작중의 무기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갖은 조건이 필요합니다. 흔히 소설을 쓰는 데 ‘액자식 구성을 애용하지 말라’라는 조언이 나오곤 하는데, 그 자체는 우스갯소리에 가깝지만 얻는 것과 잃는 것이 명확히 구분되는 해당 구성의 특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런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구성을, 현재를 달리고 있는 사건의 ‘폭’을 넓혀주는 과정이라고 정의합니다. 현재 주인공의 시점에서 관찰되는 사건을 ‘표면’으로 규정하며, 그 표면에 담을 수 없는 정보를 제시하는 것이 과거의 역할로 작동하죠. 그런 면에서 살펴보면, 이 작품은 ‘정보의 제시’라는 분야에서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하는 편입니다. 단순히 주인공 예나와 향미의 서사를 덧붙이는 것만이 아닌, 작중에 나오는 연구소에 대한 실험, 핵무기 이상의 무기를 필요로 하던 북한의 정세, 실험으로 어머니를 잃었던 수호의 서사 등 정말 많은 것들이 과거로 편입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죠.
사실 이 많은 정보를 하나의 이야기로 담아낸다는 것은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가를 따져야할 정도로 힘든 일입니다. 다만 이 작품에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데, 정보를 말 그대로 ‘정보’로만 취급하는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작가님께서는 과거와 현재의 사건이 한 시점으로 모여들며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을 유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시를 들자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와 같은 효과를 의도하셨다고 생각하는데, 그 의도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과거 장면 하나하나가 현재와 더 가깝게 배치될 필요가 있고, 더 밀접하게 배치될 필요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과거를 중간에 배치한다는 것은 그 사건 자체가 복선으로 방점을 찍겠다는 의도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과거로 배치되고 있는 장면들은 하나의 사건으로 규정하기에는 너무 장황하며, 설명적이고, 또 거대합니다. 단순히 예나와 수호 두 시점을 전개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과거와 아픔,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는 온갖 사건까지 몰아주면서, 현재의 시점에서 그들을 완성시킬 수 있는 사건이 거의 보이지 않는 역설이 성립하고 있습니다. 인물 자체는 현실을 움직이고 있지만 갈등과 고난을 비롯한 소설적 장치들은 모조리 과거로 보내버리고, 그 모든 것들을 풀어내는 방식은 ‘과거’라는 편리한 변명 아래 무척 설명적으로 제시됩니다.
다시 말해, 독자로서는 이 과거와 현재가 겹치는 절묘한 구성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감각을 느끼기 보다는, 현재와 분리되어 있는 정보를 과거라는 형태로 보여주는 형태의 감각으로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과거에 해당하는 모든 장면들은, 일종의 현재에 담을 수 없는 정보를 부연설명으로 풀어낸 무언가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런 장황한 과거들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지금 당장의 시점에서 문체를 비롯한 기술적인 면이 그것을 받쳐 준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만약 작가님의 의도대로 이 구성이 작동을 시키려면, 임시방편으로 수호를 현재 시점으로 더 끌어당길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인물들을 더 일찍 예나의 눈앞에 등장시켜야하고, 예나가 직접 그들의 사정을 듣고 해석할 여지를 주어야합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작가님이 공을 들이신 이 구성이 무척 아쉽게 느껴지겠지만, 일단 이 작품에 일차원적으로 제시된 정보들을 적어도 ‘소설’의 형태로 담아내기 위해서는 당연 주인공의 관찰시점을 넓히는 것만이 방법입니다.
사실 이 소설에서 ‘정보’라는 분야를 다루고 있는 방식을 보면, 어떤 소설적인 해석보다는 인용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앞서 북한을 다루는 묘사가 무척 일차원적이라는 것 또한 일반인들이 흔히 알고 있는 정보를 그대로 차용했다고 보면 이해가 쉽고, 중간에 등장하는 크렘린 정상 회담에 대한 내용을 다룬 장면은 위키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발췌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소설적인 해석이 없는 편에 속합니다. 푸틴이나 김정은처럼 실존인물들을 등장시키는 장면도, 인물의 묘사가 없이 그저 대사만 달아놓은 누군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굳이 이런 현실적인 정보뿐 아니라, 예나와 향미가 당한 폭동과 폭행 등 허구적 장면조차 비슷한 건조함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아직은 이 소설이 설정 이상으로 이야기가 구체화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다른 분 리뷰에서 지적한 ‘인물이 매력이 없다’는 언급 또한, 결국 이 인물이 구체화 되고 발현될 수 있는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4.『어울리지 않는 재료들을 냄비에 담아』
플롯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단계별로 장황(?)해지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외진 마을로 조난당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귀신에 의한 살인이라는 공포 요소를 제시하며, 마침내 웅덩이와 연구소를 등장시키며 ‘살인마의 영혼’과 ‘악마’라는 주제에 다다릅니다. 더 나아가, 평행세계라는 반전을 등장시키고 무력통일 된 한반도의 비극을 강조하며 향미 개인의 아픔을 극복하는 전개를 보여줍니다.
자, 위에 요약된 줄거리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 요약을 읽고 물음표를 하나씩 띄우기 마련입니다. 제시되는 키워드만으로도 그 이미지가 상당히 거대한데, 이 작품은 그것들을 전부 하나의 플롯으로 엮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저 모든 요소들이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소품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북한이라는 배경도, 레즈비언이라는 관계도, 악마가 튀어나오는 웅덩이도, 소련의 피실험자였던 살인마도, 전부 무언가 하나씩은 소설에서 역할을 하도록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이유가 없이 존재만 드러냈다면 하나만 집중하라 권유드릴 텐데, 이렇게 모든 것들이 사연 하나씩을 부여잡고 있으니 설정을 고민하신 작가님을 생각해서라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개인적인 감상에서 이 작품이 본격적으로 난감해지는 것은 메인빌런인 ‘체르노프’라는 인물이 본격적으로 앞서 나오면서부터인데, 이 인물의 가장 큰 특징은 말이 무척 많다는 점입니다. 남의 몸에 빙의해서 어두운 기억을 들추겠다는 심산으로 온갖 더러운 말들을 쏟아내는 건 기본이고, 붙임성도 대단한지 심각한 상황에서 스무고개를 제안하는 발칙한 면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악마 소환(?)이라는 궁극적인 목표까지 갖고 있는 등 드라큘라 이래로 가장 목적이 선명한 악당이라는 인상마저 받았습니다.
무례하다면 죄송하지만, 작가님께서는 그 점을 고민해주셨으면 합니다. 위에 설명한 저 친구가
“이계의 지배자여…. 어둠의 천사여….”
하면서 기도하는 장면과
“두 분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이 더 논리적이오. 특히, 웅덩이. 저 웅덩이가 차원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잖소?”
라며 평행세계에 대한 힌트를 제시하는 장면과
“민주주의를 사수하라! 민주주의를 사수하라!”
라고 광화문에서 시위하는 시민들의 이야기가 한 플롯에 담겨 있다는 것이 독자들에게 어떤 인상으로 다가올까요?
누군가는 그것을 굉장히 신선한 시도라고 여기겠지만, 누군가는 심각한 장면에서도 웃음을 한 번 삼키게 되는 농담처럼 느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연구소와 실험에 관한 이야기는 현 시대에는 상투적으로 여겨질 법한 이야기라 넘어간다 해도, 그 목적지로 제시되는 ‘체르노프’라는 존재가 저런 오컬트에 함몰된 광인이라면, 작품의 주제와 배경에 대해 당연한 이질감을 표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도 개인적인 감상에 불과하지만, 체르노프가 하는 대부분의 대사들은…… 이렇게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유치한 편이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면도 있었습니다. 좋게 생각하면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프레디 크루거’ 같은 캐릭터를 조형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싶지만, 적어도 말재주는 능수능란했던 프레디에 비하면 체르노프는 특유의 문어체에 함몰된 대사와 행적 모두 평면적인 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인물보다는 어떤 재앙으로서 기능한다고 보면 납득은 됩니다. 애초에 이름도 러시아에서 흔하기로 손 꼽히는 ‘체르노프(Чернов)’인 것만 봐도 개성을 고려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걸로 판단됩니다.
앞서, 작가님이 한 걸음 떨어져서 엿보게 만드는 호러 감각을 가졌다 호평한 걸로 기억합니다. 그것은 분명 시작은 호러에 가까운 감각으로 진행되었다는 걸 의미합니다. 하지만 연구소가 나오고, 웅덩이가 나오고, 그에 얽힌 살인마 악령의 존재와 악마가 들어오는 평행세계로 가는 문까지 튀어나온다면, 이미 이 작품의 장르를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사라집니다.
물론 다양한 장르를 섞는 것은 기존 장르의 식상함을 타파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입니다. 하지만 장르가 혼합되어도 결이 유지되는 여느 작품에 비하면, 이 작품은 마치 장르라는 구분을 두지 않고 쏟아낸 무언가처럼 느껴집니다. 장면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그럴 듯하지만, 결국 전체적인 그림은 난감한 인상을 전해줍니다. 그곳에 민족주의와 북한이라는 거대한 포장지마저 덮이면, 이미 진지한 주장조차 농담처럼 느껴질 정도로 무게감은 사라져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고백하자면, 이 작품 리뷰를 쓰기 전에 친분이 있는 작가님들께 감상 의견을 구해봤습니다. 대부분의 작가님들의 의견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지적은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했지만 성공적이지 않고, 막상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중심이 보이지 않는다’였습니다. 작가님께서는 그 중심을 ‘향미’라는 인물이 속해 있던 북한이라는 배경으로 제시할 생각이 아니었을까 추측하지만, 그 배경적 소재에 담아낸 오컬트, 이세계, 호러 등 각종 장르적 이야기는 너무 날 것으로 차용되거나 어울림 없이 끼워 맞추는 등 전체적으로 삐걱거린다는 인상으로 나타납니다.
예시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언젠가 각종 논란을 일으키고 조기 종영되어버린 <조선구마사>라는 드라마를 기억하시나요? 비록 그 작품은 첫 화를 남기고 원본 자체가 폐기되어버렸지만, 앞으로 진행되었을 이야기에 대해서는 각종 시놉시스가 남아 있습니다. 가령 ‘가톨릭 사제들이 조선으로 찾아와 태종의 아들들과 구마 의식을 진행한다’거나 ‘태조 이성계가 생시(좀비)들을 이용해 조선을 건국했다’ 같은 이야기가 그것이죠. 이 진지한 시놉시스가 공개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난감함을 보였는지 떠올려본다면, 지금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객관적으로 판단해볼 만한 지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5.『뜻을 덜어내고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면.』
흔히 장르적 재미와 주제의 깊이를 동시에 챙긴 작품이 비로소 명작이 된다고들 말합니다. 물론 재미도 주제도 그 평가 기준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재미와 주제를 동시에 잡는 어느 형태에 대해서는 다들 인식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작품을 읽으며 재미와 주제 양면으로 신경 쓰고 있다는 의욕적인 인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북한이라는 배경과 호러 및 오컬트적 요소와 결합이라는 실험적인 소재와 더불어, 퀴어적인 주인공과 한반도 통일에 대한 소재로 민족적인 주제를 나타내는 방식도 어느 정도 이 작품이 단편적인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주는 데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간혹 작가님이 보여주고 싶은 주제가 이야기를 뒤로 밀어내며 앞서 나온다는 인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아주 사소하게는 인물들의 사변적인 대사에서 그런 인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광화문 광장의 시위 장면을 보며 “이런 일이 남한 사람들한테 처음은 아니잖아. 어떻게 얻은 민주주의인데…….”라며 안타까워하는 장면이라든가, “이런 시위는 북한에선 상상도 못 해. 남한 사람들은 자유가 뭔지 아니까 할 수 있는 거지.”로 받아치는 대사들은 이런 주제들이 앞서 나오다보니 상당히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편입니다. 그것과 별개로, 광화문 학살과 같은 장면은 <화려한 휴가>를 비롯한 영화에서 등장하는 민주화 운동의 장면을 그대로 차용한지라 큰 감흥은 없는 편이었습니다.
사소한 이야기지만, 시위대를 향해 ‘동무’라고 외치는 군인들은 고증에 맞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동무’라는 호칭은 적대하는 사람에게 쓰는 호칭이 아니기 때문이죠.
사실 이 작품에서 대부분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묘사된다기보다는, 그 자체가 작위적으로 삽입되었다는 인상이 강합니다. 가령 전쟁 중에 남한에서 쏘아올린 미사일로 웅덩이가 생겼다는 설정만 봐도, 웅덩이가 전쟁의 상흔이나 마찬가지라는 해석에 다다를 수 있지만, 플롯으로 보자면 그 자체는 이 웅덩이 탄생비화만을 다루기 위해 준비된 설정에 가깝습니다. 체르노프가 빙의할 때마다 어두운 면을 건드는 묘사도 후에 등장할 향미의 아픔을 강조하는 어떤 과정으로 보이지만, 그 행위만 보면 작위적인 대사와 소란만 가득한 이미지 때문에 결을 다듬는 과정에서 반드시 잘라내야할 장면으로 읽혔던 것도 아쉬운 부분 중 하나였습니다.
작가님께서는 ‘결말을 잘 살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그 결말이란 것이 향미가 평행세계의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을 말하는 걸로 이해했는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이 장면만 따지고 보면, 해석의 여지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녀는 어릴 적 부모를 잃었고, 통일이 된 이후에도 고난을 당했으며, 심지어 동성애라는 현대 사회에서 다소 이질적인 위치에 있는 제 자신에 고민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로 인해, 평행세계에서 자신의 흔적을 발견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익힌다는 해석이 가능하겠죠.
여기서 ‘가능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럴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해석에 필요한 정보는 해당 장면에 전부 담겨 있고, 저는 그것을 토대로 추측한 것에 불과합니다.
냉정히 말하자면, 저는 향미의 결말에 대해 무엇을 느껴야하는지 혼란스러운 감이 있었습니다. 앞선 이야기는 대부분 예나와 수호의 시점을 쫓아왔고, 향미는 다소 겉도는 위치에서 그들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독자로서는 당연히 빙의 되어 날뛰는 향미보다는 예나 쪽에 비중을 두고 읽기 마련입니다.
물론 작가님께서는 향미라는 인물을 조형할 수 있는 갖은 정보들을 배치해놨습니다. 다만 앞서도 말했듯이, 쓰는 것과 표현하는 것은 결이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정보가 충분할지라도 그것이 독자에게 전달되려면, 그것이 인물로 묘사되는 사건과 맞부딪힘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인물을 조형하는 정보는 대부분 과거에 몰려 있고, 그 과거의 내용들은 장면의 구현보다는 정보의 제시에 가깝습니다. 설령 그 정보들이 현재에 영향을 끼치고 있더라도, 그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는 부분들은 전부 ‘체르노프’와 ‘악령’과 같은 요소들이 판치며 시선을 흐리고 있는 판입니다. 애초에 독자로서는 향미에 대한 인물에 공감하고 집중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의미입니다.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현재에서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예나조차도 그 인물자체가 평면적인지라, 비단 향미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예나와 향미의 역할을 바꿨다면 결말에 더 울림이 있었을까? 라고 질문한다면……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 힘듭니다. 애초에 둘의 인물상이 구분되지 않는 것도 한 몫 하는 편입니다.
지금까지 리뷰에서 줄곧 언급하던 것은, ‘설정은 많지만 그것이 표현되지 않는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예나, 수호, 향미를 비롯한 인물들도 이런 단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은 많지만, 만일 그 사정들을 전부 벗겨냈을 때 이들이 어떤 인물인지를 생각한다면……. 죄송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막말로 저는 이 인물들이 활달한지, 소심한지, 내성적인지, 화를 잘 내는지 등 아주 기본적인 성격조차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배경설정’과 ‘주제’이지 ‘인물설정’은 아니라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 작품은 어떤 습작에 가까운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실험적인 배경과 장르를 제시하지만 그것이 어우러지진 않으며, 배경설정과 주제는 명확하지만 그것이 소설이라는 이야기로 정제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이 작품이 엉망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분명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장점이 명확하여 발골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인상도 주고 있습니다.
만약 저에게 이 작품을 퇴고하라고 맡겨주신다면, 가장 먼저 제거해야할 요소는 ‘북한’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통일, 전쟁, 핵실험, 미사일 등 대부분의 주제적 요소는 이 북한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런 요소들이 나머지 장르적 특성을 죽이는 효과를 낳고 있는 것과 더불어, 이 작품이 내세우는 북한이라는 요소 자체도 묘사가 진부한 편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작품에서 감각적으로 내세웠던 ‘호러’ 요소를 살리는 쪽이 더 바람직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장면들도 문체 면에서 가다듬을 필요는 있다고 느끼지만, 문체만 가다듬어도 살려낼 수 있는 장면들이 있다면 그쪽에 방점을 찍는 것도 시도해볼 법합니다.
만약 이 작품의 배경이 남한의 알려지지 않은 섬마을이고, 주인공들은 모종의 이유로 섬으로 떠밀려와 사건에 휘말리고, 그곳에서 국가기밀의 악의적인 실험이 벌어지고 있다며 설정을 바꾼다면 어떨까요? 솔직히 전체적인 플롯에서 큰 위화감을 느끼지 못 하리라 생각합니다. 남한을 배경으로 해도 ‘탈북자’라는 개념으로 개연성 있는 북한 인물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굳이 통일과 같은 거대한 이야기를 다룰 만한 확고한 이유가 있지 않다면, 한 번 고려해볼 만한 사항이라 생각합니다.
작가님께서는 이 작품이 ‘웹소설도 아닌 것이 일반 소설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며 자조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작가님의 그 표현이 이해가 가는 편입니다. 현재 작품에서 보이는 다소 글맛이 없고 정보만 직관적으로 제시하는 구성은 전형적인 ‘웹소설’의 형식이지만, 작품 내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와 스케일만은 본래 ‘일반 장르 소설’에 가까운 무언가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로서는 의외로 시각적인 이미지가 좋다고 여겼던 여느 장면들도, 그런 글맛이 부족한 문체 탓에 시나리오 지문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것이 이 작품이 시나리오가 어울린다고 단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나리오라면 마땅히 실감나는 대사 쪽에 방점이 찍혀야 하지만, 이 작품은 인물들의 목소리가 거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문어체가 심하기 때문에 선뜻 그쪽에 어울린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북녘에서 이계의 악마를 깨우다>는 많은 것들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장점과 단점을 구분하고, 가져갈 것과 덜어낼 것을 구분하다보면, 발골 된 것들은 가는 뼈마디에 가까울 것입니다. 저는 작가님이 그 뼛조각 하나를 부여잡고 다시 이 작품을 완성시키기를 기대합니다. 저에게도 멋진 작품이었고, 한동안 머릿속에 구겨 넣고 싶은 기분 좋은 인상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인상적인 작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멋진 집필 활동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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