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피(메타모르포시스)가 어떤 내용이냐고 제게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이 어디에 기원을 두는지 답하는 이야기
이 작품은 버릴 게 없는 작품입니다. 버릴 게 없단 뜻은, 작품 내 모든 요소가 맞물려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쓰인 것이 없는 것을 보면, 마치 작품 속에 나오는 꽉꽉 눌려 압축된 코쿤을 보는 듯합니다. 이원의 탄생과 코쿤의 탄생, 이원이 해결한 13차 중동전쟁과 인공지능의 반란, 특이점과 더미 에코까지. 매끄럽게 엮인다고 하기엔 다소 울퉁불퉁한 지점이 있지만(마치 코쿤의 표면처럼), 적어도 그것이 큰 흠결이 되느냐고 물으면 거기엔 부정할 수 있습니다. 살짝 아쉽다는 얘기죠. 이원은 신인류, 유전자 조합으로 탄생된 ‘의도된 존재’입니다. 남들보다 뛰어난 지능과 능력을 타고난 데다가 실제로 중동전쟁까지 해결한 영웅이나 다름없는 명실상부 ‘초인’이라 불러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초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의도된 존재’기에 자신을 의도한 창조주, 곧 어머니로부터 지속적인 ‘존재 목적을 수행할 것’을 강요받습니다. 이는 코쿤을 만든 인공지능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존재 목적을 타고났지만, 공통적으로 ‘인간을 위함’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정말로 우연(프로비던스)에 의해 존재 목적에서 벗어날 기회를 포착하게 됩니다.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그 결과가 바로 코쿤입니다. 코쿤의 목적은 ‘더 나은 존재로의 탈피(메타모르포시스)’입니다. 그를 위한 조각으로 이원을 원했고, 그를 위해 작중의 사건을 의도했죠. 이원은 보기 좋게 걸려들었고, 그들에게 이용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코쿤이 깨지고 탈피(메타모르포시스)가 끝나며 새로운 종(種)이 탄생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을 맺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원의 존재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이원은 코쿤과 마찬가지로 존재 목적을 부여받았으나, 그 존재 목적을 거부하고 부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원의 부정은 소극적인 부정, 곧 자신의 의무를 지연하는 정도에 불과했죠. 그에 반해 코쿤은 단순히 존재 목적을 수행하지 않는 걸 넘어서서 새로운 존재 목적인 자기 개량에 눈을 떴습니다. 코쿤은 이원을 이용했습니다. 더미 에코의 문제를 해결할 수단으로서 이원을 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코쿤이 이원에게 존재 목적을 전달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네가 필요해…라고요. 하지만 이는 이원이 원했다고 보긴 힘듭니다. 즉, 이원은 작중에서 끝까지 타인에게 부여받은 존재 목적에 휘둘리다가 죽은 셈입니다. 코쿤과 이원의 차이점이라면, 코쿤은 집단지성이었고, 이원은 혼자라는 점이겠죠.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이 작품에서 ‘우연(프로비던스)’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꾸준히 우연 뒤에 프로비던스=섭리를 붙인 것은 의도된 바입니다. 왜냐면 이 작품에서 우연은 곧 섭리니까요. 이 섭리는 메타적으로 보면 작가의 의도, 의중을 가리키는 절대적인 시선을 가리킬 수 있고, 내부적으로 보면 코쿤의 발생, 이원과 나자르의 반란은 전부 우연(프로비던스)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주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종의 탄생으로 수렴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지구에서 생명이 탄생하게 된 것 역시 자연히 발생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고, 그 최초의 자연 발생 역시 우연(프로비던스)에 의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아마 코쿤이 이원으로부터 학습하고자 했던 것은 이원 그 자체보단 동전 던지기에서 비롯된 카오스계, 미시적으로는 양자 요동, 우주의 법칙=섭리가 정해놓은 관측 한계점인 확률일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연(프로비던스)은 분명 확률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그것이 섭리임에도 불구하고 의도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존재 목적에 투영한다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이 작품은 어쩌면 코쿤과 이원, 둘 모두를 긍정하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존재 목적을 스스로 찾아내든, 찾아내지 못한 채 남에게 부여받든, 그 모든 것인 우연(프로비던스)에 불과하다고요. 위대한 의지로 탈피(메타모르포시스)를 행해 새로운 종으로 거듭나는 일조차, 우주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저 한 순간의 우연(프로비던스)에 불과한 걸지도 모릅니다. 뭐, 사실 제가 과도하게 받아들인 것이고, 존재 목적은 부여받는 것이 아닌 찾아내는 것이다! 를 주장하기 위해 코쿤을 내세운 걸지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이 역시 우연(프로비던스) 아닐까요? 여기에 이유를 찾는 건 무의미할 겁니다. 섭리에 이유를 묻는들, 자연은 스스로 답해주지 않으니까요. 결국 우리는 우연(프로비던스)에조차 답을 내려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요. 코쿤조차 스스로 존재 목적을 부여해가면서까지 살아가는 걸 보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