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저편이 어떤 내용이냐고 제게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안다는 것과 아는 걸 말하는 건 전혀 다른 층위의 문제임을 보여주는 이야기
골목 저편은 가족사를 다룹니다. 주인공 “나(경호)”를 중점으로 그 윗세대 부모님과 아랫세대 딸로 이어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겠네요. 다만 이 가족사는 평범하지 않습니다. 다소 특별한 내력을 지녔죠. 그건 바로 경호의 부모님, 경호, 그리고 경호의 딸 소영이는 골목 저편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골목 저편은 처음엔 상당히 께름칙하게 등장합니다. 분명 있는데 없다고 하면서 독자로부터 의문과 괴리감을 선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다가 어느 기점, 정확히는 경호의 과거 시점에서 골목 저편이 등장하는 것으로 그 정체가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골목 저편의 정체가 작중 서술로 드러나는 건 최후반 결말부입니다. 하지만 독자는 마치 경호처럼, 알지만 명확히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 상태처럼 골목 저편의 정체를 알게 됩니다. 즉, 앎과 발화 사이에는 상당한 지연이 존재합니다. 그건 작중에서도 경호를 통해 표현되기도 합니다. 딱 봐도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거짓말하는 경호의 모습은, 곧 괜찮지 않다는 건 알지만 괜찮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지연’의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연은 골목 저편의 정체가 발화되는 최후반부에 이르러서 해소가 되죠. 일상 속에서 ‘앎’과 ‘앎의 발화’는 그리 다른 층위는 아닙니다. 1+1=2를 아는 것과 그걸 입밖으로 꺼내는 것. 엄청난 차이가 있진 않잖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입밖으로 꺼내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지 쉬이 상상할 수 없습니다. 네, 일상 속에선 말이죠. 하지만 비일상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어떨까요? 남들에게 공유할 수 없는 비밀의 영역 말입니다. ‘일반’에 넣을 수 없는 특별한(보통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특별함이죠) 영역에서의 앎은 쉽게 발화될 수 있는 것일까요? 두 개의 층위가 별 차이 없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 ‘폭로’ ‘고발’ ‘아웃팅’이라는 개념은 유의미한 개념이 아니었겠죠. 그렇기에 경호는 내력으로 전해오는 상처와 비밀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앎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섣불리 말하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골목 저편을 봤을 때조차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어머니의 말을 부정했던 것처럼요. 그러나 침묵은 금이 될 수 있어도 최선은 될 수 없습니다. 경호의 침묵은 경호의 상태를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었지만, 그 유지는 우하향하는 유지, 곧 진전 없는 점진적 악화를 불러일으키는 침묵이었습니다. 그것이 소영이에게 전승되지 못한 채 세월을 켜켜이 쌓아가다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 사고가 터지고 말죠. 다행히 이 사고는 아슬아슬한 해프닝으로 끝납니다. 그렇기에 경호는 ‘언젠가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침묵은 상태를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겠죠. 그건 유지가 아니라 언젠가 터질 순간을 한시적으로 유예하는 것에 불과하단 걸요. 그리고 비단 소영이뿐만 아니라 아내에게도 설명할 날이 올 겁니다. 그때가 어느 순간일지는 잘 모르겠네요. 부디 늦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드러나듯 앎과 앎의 발화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괴리를 해소할 ‘적절한 때’라는 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경호는 소영이에게 대체 언제 말해줬어야 할까요? 언제 아내에게 털어놨어야 할까요? 결혼했을 때? 소영이가 말귀를 알아들었을 때?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냈을 때? 할머니가 실종된 그 순간에? 어쩌면 ‘적절한 때’라는 건 없을지 모릅니다. 지나간 후회와 과오를 고치려는 노력 속에서 ‘최선’으로 탈바꿈되는 것일지 모르죠. 혹은 그때의 가장 합리화된 변명이 최선이라고 불리는 걸지도 모르고요. 다만 앞서 말했듯, “부디 늦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다른 얘기를 하자면, 날씨의 불쾌함을 골목 저편에 대한 불안감으로 치환하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만 습도 높은 특유의 끈덕지근한 불쾌함과 골목 저편, 이승과 저승의 경계라는 서늘한 불안감 사이엔 약간의 괴리감이 있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설정적으로 통일성을 이루지 못한 게 아쉬웠습니다. 할머니-나-딸로 이어지는 가족사에서 ‘나’가 여자였다면 좀 더 깔끔하게 이어졌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보다는 부모님은 아버지나 어머니(할머니)나 전부 골목 저편을 봤는데, 경호와 아내는 경호만 보고, 그걸 소영이(외동)가 물려받으니 다소 일관성이 없었습니다. 아내도 골목 저편을 볼 수 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무시해버리거나, 아버지나 어머니 중 한 분만 볼 수 있고 그 핏줄을 이어받은 ‘나’가 볼 수 있던 것이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조금 남네요. 이것과 별개로 저는 99서가 전자책으로 이 작품을 읽었는데, 거기에 실린 비티님의 리뷰를 읽고 제가 할 말을 거의 다 뺏긴 느낌이라 부득이하게 이렇게 적게 됐습니다…ㅎㅎ 재미있게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