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난관을 꿰뚫을 거인의 힘을, 미지를 풀어낼 도깨비의 재치를, 추위를 견뎌낼 겨우살이의 인내를, 그리고 죽음을 긍정할 불새의 용기를.’
- 제목에 대해
볼품없는 기생식물 겨우살이는 멸시받는 식물이다. 독자인 우리에게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태양신을 섬기는 작품의 세계관 속 인물들에게는 확실히 그렇다.
“겨우살이는 기생식물이야. 태양신의 가호를 받아 양분을 생산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의 것을 뺴앗아서 자신의 푸름을 유지하지. 이는 신의 의지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야.”
하지만 작품의 제목은 『겨우살이왕』이다. 하찮고 멸시받는 겨우살이는 어떤 의미, 어떤 방식으로든 왕이 될 것이고 독자는 그 과정을 기대하며 작품을 읽을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불과한지는 모르겠지만 겨우살이는 작중 세계관 밖 독자에게는 그렇게 하찮기만 한 대상은 아니다. 북유럽 신화에서 발더를 죽인 겨우살이 가지 때문인지 이런저런 장르작품에서 겨우살이는 흔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모두가 기생식물이라고 무시해도 겨울에도 푸름을 유지하는 인내의 상징이자 결국은 가장 작아도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아이템. 겨우살이와 왕이라는 키워드의 결합이 이제는 낯설지도 새롭지도 않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특성이 있다면 –
-그 겨우살이라는 상징이 상당히 직접적인 방식으로 한 인물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 때문에…… 북쪽의 버림받은 자들의 상징이 된 것이기도 하고.”
세계관 안에서 신을 버림받은/버린 자들의 아이로서 내심 무시당하며 살지만 독자는 탈루가 씩씩하게(!) 잘 자라온 아이임을 안다. 탈루가 자신의 수호자이자 동반자로 (신과 신을 받는 자의 내적인 관계는 단순히 힘을 빌리고 받는 것보다는 복합적인 것 같다. 이 관계도 앞으로 작품 속에서 더 풀리기를 기대하는 중.) 받게 되는 겨우살이 신은 큰 분노도 야망도 품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그러려니 받아들이며 살아온 아이에게 어울리는 신이다. 하지만 겨우살이-탈루가 어떻게 왕이 될지는 쉬이 예상이 가지 않는다. 탈루에게는 어린 영웅을 만드는 데 편리하게 사용되는 외부의 억압(불새 일족은 탈루에게 패시브-어그레시브하긴 하지만 탈루를 적극적으로 괴롭히는 사회는 아니다), 부모의 원수 혹은 출생의 비밀 (탄생과 부모가 베일에 싸여 있으니 나중에 등장하더라도 연재 시점까지는 명확하지 않다), 극복해야 하는 상실과 같은 요소가 없다. 일단 본인이 그렇게나 태평한 성격인 것을. 그나마 영웅의 길에 가장 가까운 것은 그의 친구들이 범상치 않는 인물들인 것. 하지만 제목의 겨우살이는 영웅을 돕는 사람이 아니라 ‘왕’이다. 탈루가 어떤 과정으로 왕의 길을 걷게 될지, 격동적인 각성의 순간이 있을지 아니면 마지못해 큰 짐을 이게 될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성장하고 어떤 상처를 받고 어떻게 상처들을 품어낼지 궁금해하며 다음 회차들을 기다린다.
2. 세계관에 대해
『겨우살이왕』의 가장 큰 매력은 세계관이라고 생각한다. 장르문학에서 세계관을 가지고 설정놀음을 하는 수많은 작품들에 질린 지 오래되었는데, 『겨우살이왕』의 세계관은 확실히 우리의 일상이 아닌 다른 시선을 만들어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만들어졌다. 설정을 위한 설정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하는 데 필요한 세계를 만드는 세계관은 언제나 반갑다. 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한 정도가 아니라 신들이 인간의 몸을 통해 땅 위에 현현하는 세계,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한 사람의 일생과 생활이 돌아가는 세계다. 그 가치관은 프롤로그의 장엄한 회의를 통해 큰 그림으로 그려지고, 본편에서는 신을 받기 위해 수련하는 어린아이들의 일상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신의 힘을 빌려 쓰는 사람들이라는 설정은, 물론 인물들을 살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 등장인물들은 각자 개성이 강하고 서사 속에서 점하는 위치가 확고하며, 그런 면모들은 각자의 신과 결부되어 많이 드러난다. 매력적인 캐릭터성은 이 작품이 또 다른 큰 매력 중 하나다. 하지만 그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이들은 초자연적 존재의 도움을 당연히 믿는 사람들이라는 점이 크게 보았을 때 작품을 읽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다. 신의 힘이라는 것은 이들에게 익혀서 이용하는 수단으로서의 기술은 아니어 보인다. 믿고 기대며 함께할 수까지 있는 신, 현대인 독자들에게는 상상도 하기 힘든 존재들이 언제나 곁에 있으리라고 믿는 인물들의 시선을 경험해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프롤로그로 미루어 짐작해보자면, 아마 이 세계관은 작중 뿌리째 위협받을 일이 있을 것이고, 그에 대한 인물들이 반응도 내심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