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통이 무슨 이야기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아주 비싼 값 주고 사람 되는 이야기
그래서 이 이야기가 어떻냐고 물으면, 글쎄요. 이게 약간 복잡미묘합니다. 섣불리 단언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죠. 그래서 그 단언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무엇인지 먼저 다루고, 그렇게 모두 다룬 끝에 어땠는지 얘기하는 게 순서가 맞을 듯합니다.
바통은 SF, 추리/스릴러로 분류돼 있습니다. 장르 분류는 작가가 설정하는 임의적인 분류이지만, 동시에 독자에게 작품을 독해하는데 필요한 ‘장르 문법’을 먼저 제시한단 점에서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판타지를 읽는 것과 로맨스를 읽는 것, 호러를 읽는 것과 무협을 읽는 건 분명 다른 식의 독해를 요구하니까요. 바통이 SF인 이유는 ‘시간여행’을 다룬다는 점과 그것의 매개체인 ‘바통’이 나름대로 규칙성(정합성)을 내세운다는 점이겠고, 추리/스릴러인 이유는 연재, 견재, 면재 사이에 존재하는 공존 불가능성으로 인해 ‘누군가는 남아야 하고, 누군가는 없어져야 한다’라는 결론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때문입니다. 아, 물론 미스터리 장르로서는 여러 요소가 군데군데 섞여 있어서 꼭 이것 때문에 미스터리라는 건 아닙니다. 장르의 메인이 되는 플롯이 이거라는 것이죠. 문제는 SF로서 바통입니다. 읽는 내내 제가 느낀 건, 바통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바통은 맥거핀에 불과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필요한 매개체였을 뿐, 그 이상의 역할을 가지진 못합니다. 후반에 다시 조명되나 싶었는데, 그마저 제 역할을 못하고 에필로그에 다뤄지는 걸 보면 바통의 역할은 ‘바통’이란 이야기의 서막을 여는 발사대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SF로서의 정체성은 바통 하나에 묶여있습니다. 배경은 현대고, 시간여행은 바통을 매개로 일어나는데, 바통은 9화에 아웃되더니 모든 갈등이 끝나고 나서야 돌아옵니다. 즉, 사실상 SF로서 바통이 돋보이는 부분은 초반에 바통에 대해 은수 이모가 설명하는 부분, 연재가 바통을 이용하는 부분, 이렇게가 끝입니다. 시간여행의 부작용으로 인해 과거에서 비롯된 나(견재)와 현재에서 비롯된 나(면재)가 공존하는 상황 조성 역시 SF스러운 지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만…… 문제는 “왜?”라는 질문이 작품에선 거의 제거돼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이 바통이 ‘굳이 SF여야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그냥 처음부터 ‘판타지’라고 분류했다면 여기에 ‘굳이’라는 의문을 붙일 필요도 없고, “왜?”라는 의문에 답할 의무도 없어지며, ‘현상’만을 기술하는 바통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니까요. 소프트SF와 판타지 사이의 흐릿한 경계는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소프트SF 중에는 ‘아무튼 이런 기술이 있음’이란 명목으로 판타지스러운 기술을 내놓고 시작하는 것도 더러 있으니까요. 사변적인 SF라면 굳이 어떤 원리적 고증을 필요로 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건 그 기술로 인해 생길 다양한 문제 상황의 조명이니까요. 바통 역시 그렇게 따지면 바통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바통으로 인해 연재, 견재, 면재라는 삼위일체 우연재가 겪는 자기모순의 절정이 더 중요하죠. 실제로 작품의 내용 역시 우연재라는 인물이 얼마나 한심하고 무능하고 자기모순적이었는지 다루는데 주력하고 있고, 그걸 어떻게 극복하고 해소하는지 다루니까요. 하지만 그 역시 판타지라고 못 다룰 게 아니란 점에서 더욱 모호해집니다. 그러면 더더욱 판타지와 SF 사이를 구분하게 하는 어떠한 지점을 찾게 되죠. 그것은 결국 “왜?”라는 질문의 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실제적인 고증이 아니어도 돼요. 웰스의 타임머신은 “공간축에서 이동할 수 있다면 시간축에서도 이동할 수 있다”라는 작품 내부의 정합성을 충족시켰습니다. 요컨대 ‘아무튼 논리적으로 말은 됨’을 충족하는 게 중요합니다. 흔히 말하는 핍진성이 바로 이 영역에 속하는 거죠. 판타지는 이 핍진성을 충족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전제(마법, 마나, 신화 등등)를 무조건 깔고 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SF는 모두가 어느 정도 기초적으로 학습한 ‘과학 상식’을 전제로 삼기에 그런 과정이 불필요하죠. 적당히 논리적이기만 하면 됩니다. 바통에 등장하는 바통은 사고패턴을 기록하고, 제대로 기록된 사고패턴을 통해 과거로 생각을 보내 인과율을 크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생각을 보낸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시간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여기까진 괜찮았어요. 다소 의아한 점은 있지만, 깊게 파고들지 않는 작품의 방향성을 보면서 하드한 쪽은 아니겠거니 싶었거든요.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견재’가 찾아온 것과 작중에서 정말 중요한 의미로 작동하는 ‘분열’이 그렇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작중에 나온 설명은 딱 하나. ‘바통을 잘못 사용함’입니다. 그런데 이런 설명은 심히 판타지스럽습니다. 제게 이런 설명은 마치 ‘흑마법을 잘못 사용해서 저주를 받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잘못 사용함과 견재가 찾아옴, 그리고 분열 사이엔 어떤 모종의 인과관계가 생략됐단 느낌이 강렬하게 듭니다. 사고패턴의 유지가 덜 돼 연속성이 깨진 것이 어째서 극단적인 분열이란 형태로 나타나는가?(육체의 연속성이 아닌 정신의 연속성만 깨진 것 아닌가?) 견재는 과거에서부터 달라진 연재인데 어째서 시간을 건너뛰고 넘어올 수 있었는가?(시간의 속도가 서로 다른 게 아니라면 견재가 아무리 연재와 달라진들 연재의 시간선에 닿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작품은 답해줄 생각이 없습니다. 작품에서 집중하는 건 오직 연재, 견재, 면재 사이의 관계 변화와 연재의 각성(?)이니까요. 작품이 집중하는 내용은 충분히 흥미롭고, 나쁘지 않게 잘 썼다고 생각하지만, 이들이 활약하는 무대 자체가 상당히 불안정한 기반 위에 세워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모호한 문제는 장르를 ‘판타지’라고 설정하면 절반은 해결됩니다. 절반만 해결되는 이유는 판타지라고 해서 비어버린 인과관계를 내버려둬도 된단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판타지 특유의 ‘기꺼이 속아주는’ 독해를 따라가면 다소 참작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필 SF라서 이러한 부분이 갈증으로 남아버린 것이죠…… 당연한 얘기지만 작중에서 대놓고 ‘아모른직다’로 끝낸 연재와 은수 사이의 과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시간선으로 따지면 연재는 바통을 쥐기 전에는 은수가 바꾼 시간선에 사는 것일 텐데 어째서 연재만 기억이 보존돼 있던 걸까요? 작품 내에서 판단할 근거가 충분하고 유용했다면 즐거운 추측으로 남을 미회수 떡밥이겠지만…… 판단할 근거는 없지 않지만, 즐거운 추측은 못 됩니다. 작품에선 분열의 이유도, 견재가 찾아올 수 있는 이유도, 은수가 어떻게 사용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으니까요. 어떤 결론이나 사실이 밝혀져도 그러려니 해야 합니다.
우연재라는 주인공이 초반에 제시되는 모습을 보면서 든 생각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끝이 좋지 않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왜 하필 우연재인지 답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끝까지 다 읽은 결과부터 말하면, 익히 예상한 결과는 맞췄는데 우연재가 주인공이어야 할 이유에 대해선 다소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연재가 가지는 각각의 속성들이 얼마나 유효한지 따지면, 거기에 조금은 갸웃하게 되는 지점들이 있었습니다. 무능하고 낙관적인 건 별로 문제가 안 됩니다. 이런 주인공이 내세워지면 끝에 끝까지 반성하지 못해 파멸하거나, 결국 정신적으로 성장해서 변화하거나, 둘 중 하나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파이어족에 관해서…… 우연재의 초반 목표로 제시되고 바통을 쓰게 되는 이유로 나오지만, 견재와 면재가 찾아오고 나서는, 정확히 말하면 9화 이후로는 언급이 삭제됩니다. 물론 파이어족이란 목표는 연재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매우 좋은 지표이긴 했습니다. 30대씩이나 되어놓고서 모아놓은 돈도 그렇게 없고, 투자를 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 와중에 연애를 할 생각이나 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어쨌든 연재의 초반 목표였고, 작품의 방향성을 이끌던 중요한 목표였는데, 이게 완전히 소실되었습니다. 작품이 끝나고 나서도 언급되지 않아요. 물론 다현과의 관계 때문에 파이어족을 더는 꿈꾸기 어려워졌지만, 바뀐 연재의 목표에 대해선 다현과의 무사 결혼 외에 다소 모호하게 나옵니다. 분열을 끊어내는 것 너머의 목표가 그저 다현과의 결혼 뿐인 걸까요? 말 나온 김에 살피자면, 다현이란 인물 역시 꽤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중 초반에 제시된 다현과 후반에 나오는 다현은 조금 다른 인물이란 생각이 듭니다. 초반에 제시된 다현은 엉뚱한 매력이 있는 여자로 제시되며, 다현에 대한 연재의 평가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애프터까지만 해도 형식적으로 잡아둔 느낌이 있었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 다현은 평범한 사랑꾼 연인이 되어있습니다. 연재는 다현 없이 못 사는 사람이 되었고요. 이를 뒷받침하려는 듯 다현이 사실은 첫눈에 반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묘사한 연재의 비호감스러운 외형 묘사를 생각하면 이 역시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작품 후반에 다현이 끝까지 엉뚱한 이야기들을 제시하면 모를까, 오히려 그 역할은 면재가 가져가버리죠. 다현의 캐릭터성이 모호하게 느껴졌습니다. 다현을 향한 연재의 사랑 다소 알량하게 다뤄졌었는데 어떻게 해서 죽고 못 사는 관계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면재를 통한 질투과 극단적 결말을 통한 정신적 성숙 이전에 연재와 다현의 관계가 깊어진 점을 말하는 겁니다) 파이어족이란 목표랑 엮어 생각해보면 다현과의 관계가 파이어족이란 목표를 대체한 건 분명한데, 이에 대한 서술이 존재하지 않아서 추측할 뿐입니다. 연재, 견재, 면재의 엉성함에 대해선 달리 불만을 가지진 않았습니다. 셋 다 모두 우연재라는 본질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요. 다만 연재가 제일 낙관적이고 무능하게 군 건 관성 때문이라고 쳐도, 면재 역시 똑같은 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면재의 변화폭이 너무 커서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인물간 대조를 이루고 인물간의 개성을 부여해 구분을 이루기 위한 조치…라거나, 면재가 연재가 품은 가능성을 구현한 인물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작품 외부적 해석일 따름입니다. 내부적으로 볼 때 면재가 연재보다 더 꼼꼼하고 스윗하고 로맨틱하며 교활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면재는 하는데 연재는 못하는 걸까요? 심지어 연재와 면재의 차이는 연재와 견재의 차이보다 좁은데 말이죠. 분열해서 타인이 되었으니 미묘한 차이가 쌓이고 쌓여 변화한 걸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2주도 안 돼서 차이를 빚을 만큼의 어떤 결정적 요인이 작품 내에 제시된 것 같지 않아 의아할 따름입니다. 제게는 마치 처음부터 면재는 다른 인물로 분열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견재에 대해선 면재보다 더욱 기능적인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다른 인물’처럼 제시되었지만 어쨌든 이 친구도 우연재라고 주장하기 위해 행동에 제동이 걸리거나 다소 비합리적인 일을 수행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결국 견재가 한 일은 분열에 대한 개념을 제시하고 설명해주고 경고하며, 연재의 최대 시련으로 나선 것 외에는…… 딱히 없잖아요? 사라진 돈의 행방을 밝힌 건 좋았지만, 그게 중요하진 않았죠. 그게 밝혀질 시점엔 파이어족이니 뭐니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으니까요. 그 외에 신영이나 은수에 대해선 이야기의 포문을 열고 닫는 조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지라 그리 큰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초반에 다현이 말한 기억점이나 은수의 바통 사용 설명은 좀 더 간략하게 다뤘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어지긴 하네요. 결국 메인이 되는 게 연재, 견재, 면재의 이야기라면 말이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바통의 한 줄 요약이 갱생이라고 말했습니다. 뭐, 좀 극단적인 방식을 쓰긴 했지만 어쨌든 갱생하고 사람 됐으니 다행 아닐까요?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문제 없이 처리하긴 했어도 말이죠. 백수 한량보단 성실한 연속살인마가 낫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이야기의 파국은 초반에 제시된 연재의 수동적이고 조급하며 지극히 한량스러운 태도에서 이미 예고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목한 건 결말보다는 파국으로 어떻게 나아가는지, 그것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앞서 말했듯, 연재의 캐릭터성이 주인공으로 내세워졌다면 결말은 둘 중 하나였으니까요. 그런 입장에서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변화를 맞이하는지 크게 두 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축은 신영에게 바통을 넘기는 지점입니다. 술에 취해서 명상에 도움 되라고 신영에게 건네준 바통은 그대로 이야기를 이탈해버립니다. 그리고 모든 게 마무리 되고 나서야 돌아옵니다. 돌아오고 나서 딱히 역할을 가지지 않아요. 말 그대로 이야기의 축이 바통에서 연재 그 자체로 넘어가는 지점입니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이 다소 혼란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죠. 바통이 중요한 소재인 건 맞는데, 중심 소재는 아닙니다. 바통이 원인은 맞는데, 해결책인 건 아닙니다. 바통이 시작한 건 맞는데, 끝을 맺은 건 아닙니다. 저는 적어도 바통이 적절한 타이밍에 돌아와 바통을 둘러싸고 연재, 견재, 면재가 다툴 줄 알았어요. 그 과정에서 살인도 일어나지 않을까 싶었고요.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살인은 일어났지만요. 그러니까…… 바통은 결국 한 게 없습니다. 하지만 이 얘기는 잠깐 미뤄두도록 하죠. 지금 다루는 건 이야기니까요. 두 번째 축은 연재가 견재, 면재와 공존 불가능성을 깨닫는 지점입니다. 견재가 찾아온 9화부터 연재가 이렇게 살 순 없다고 다짐한 21화까지, 장장 12화에 걸쳐서 연재는 자신이 안일함과 무능함이 만들어낸 파국을 겪어야 했고, 공존 불가능성을 깨닫고 나서야 다시 극이 새로운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즉, 이야기는 크게 세 지점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통이 유효한 초반부'(1~9화), ‘위험한 동거가 이어지는 중반부'(9~21화) ‘파국과 그 이후의 후반부'(22~28화)로요. 그리고 사실상 견재가 등장하는 9화 끝부터 사망하는 25화까지, 약 16화 분량이라는 절반이 넘는 이야기가 연재, 견재, 면재의 이야기입니다. 바통이 제일 많이 할애하는 지점이 곧 바통의 중심이자 핵심이죠. 바통이 다루고자 하는 건 연재의 무능함과 안일함, 조급함이 불러온 재앙입니다. 그 대가는 피로 갚아야 했고요. 어떻게 보면 심히 교훈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우린 연재처럼 분열하는 것도 아니니, 대신 죽어줄 사람이 없잖아요? 하하. 연재의 무능과 안일함이 파국을 맞이하기까지는 사실 21화까지 가야 본격적으로 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꿔말하면 연재의 파국은 1~3화에 충분히 예고가 됐는데, 진짜 파국은 18회차는 더 읽어야 나온다는 거죠. 18회차면 작품 분량의 거의 2/3입니다. 그러니까…… 좀 답답한 느낌을 주기 쉽습니다. 단순히 연재가 답답한 게 아니라, 좀 파국이 일어날 거면 빨리 일어나던가, 그조차 아니면 연재가 좀 각성이라도 하던가! 하는 전개 상의 답답함입니다. 왜냐면 작품의 3/4까지 가지 않으면 작품 내내 ‘곧 파국이 일어날 거예요…!’라는 빌드업만 보고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걸 해소하기 위한 강렬한 임팩트로 분열 장면이 삽입돼 있지만……(사실 이 부분의 그로테스크함 덕분에 파국이 일어날 때 지지부진한 전개와 별개로 확실하게 단도리칠 거란 믿음이 생겼습니다) 가뭄에 단비 같은 임팩트였기에 더욱 돋보인 것도 있습니다. 이 역시 우연재라는 캐릭터성 때문에 빚어진 전개상의 특징이라고 둘러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너져야 할 인물’을 내세워놓고 ‘무너지는 과정’이 질질 끌리는 건 감질맛 이전에 흥미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특히 연재의 삶이 면재에게 뺏기는 과정 사이에 또 바통 행방으로 템포와 초점을 빼앗겼다가 되돌려받는 부산스러움이 ‘질질 끌린다’는 인상을 더해줍니다. 면재가 연재의 삶을 침탈하는 과정 역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져(그게 좀 더 자연스럽긴 하지만) 긴장감이 착실히 쌓이기보다는 연재의 무능함만 더욱 조명되었습니다. 그래서 연재의 불안과 긴장이 점차 커지기보다는, 어느 순간 확 터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파민이 사실상 22화 이후에 몰려있고, 그것도 25화에 끝나 26~28화는 에필로그에 가깝습니다. 그전까지 연재의 무능함과 안일함이 쌓는 파국의 빌드업을 충분히 견딜 만한 흥미가 유지되느냐……라는 질문에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작가님의 충분한 필력과 인물간의 적절한 케미,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사건, 혹은 해프닝의 발생은 회차 단위로 볼 땐 그렇게 큰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어요. 그 순간순간의 전개와 회차당 재미 요소가 자칫 지루하고 질질 끌리는 빌드업을 어떻게든 소화해내 22화의 도파민을 무사히 터트렸다는 인상입니다.
뭔가 실컷 병 주고 약 하나 주는 느낌이긴 하지만, 정말로 저는 나쁘지 않게 잘 읽었습니다. 하나씩 따져보면 그렇긴 해도, 저는 이런 파국을 맞이하는 전개와 극단적인 과정을 싫어하지 않거든요. 특히 제가 마음에 들었던 지점은 ‘결국엔 망설이지 않는 점’입니다. 연재가 만약 끝까지 망설이거나 어설프게 고민하거나 그랬다면 작품의 주제도 중심도 전부 흐리멍덩하게 됐을지 모릅니다. 다행히 그러지 않았어요. 28화에서 살짝 불안하긴 했는데, 저는 적어도 연재가 늦지 않았다는 말이 연재가 망설이지 않았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물론 찾아온 쪽도 연재이기에 작가님께서 일부러 결말을 열어두신 거겠지만요. 하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결국에 ‘우연재’ 하나만 남는 건 동일하니까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않을까요? 망설이지 않는 우연재라면 말이죠. 우연재가 조금 더 젊었다면, 30대란 아저씨 같은 나이 말고, 파릇파릇한 20대 대학생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사실 20대라고 해서 바통의 이야기가 달라지리란 법은 없습니다. 약간의 배경과 세부사항이 달라질지언정, 그대로 전철을 밟을 수 있어요.(사실 그런 점에서 굳이 우연재가 30대여야 하냐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긴 하지만, 다현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결혼을 바라볼 나이로서 30대의 유효함을 인정했습니다) 바통을 다시 찾은 우연재가 새롭게 바통을 이용할까요? 그 일을 겪고서도? 그건 모를 일이죠. 신영이나 다현에게 건네줄지 모를 일이고요.(여자친구가 2명이 되는 걸 노리고 건네는 개막장 도파민 전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분명 바통은 가능성을 많이 열어둔 작품입니다. 그게 설명이 부족해서 열렸든, 작가가 고의로 열었든 간에 말이죠. 그리고 바통은 그러한 가능성이 충분히 매력으로 작동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건 명확히 해야겠네요. 그래서 이 작품의 본질적인 설정은 바통에 있지만, 바통의 ‘시간여행’ 설정이 본질은 아닙니다. 시간여행은 이 이야기의 촉발에 불과하니까요. 작품 내에서도 언급했듯, 이 작품은 시간여행보단 도플갱어 딜레마를 좀 더 다루는 데 주력하고 있고, 그를 통해 자기모순을 마주한 연재가 파멸적인 과정을 통해 성장한 게 결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