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 광년을 넘어 당신을 알고 새기는 운명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로흐 (작가: 장아미, 작품정보)
리뷰어: 피오레이, 19년 4월, 조회 100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 이야기에서 ‘운명’이라는 설정은 숭배심을 부를 만큼 낭만적이다. 사랑이라는 절실하고 강렬한 감정이자 욕망에 현실의 법칙을 저만치 능가한 절대성과 당위성을 부여해 그 사랑을 공유하는 당사자들을 굳건히 결합시켜 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은 마침내 만나 오래도록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후일담을 조금도 보장하지 않는 운명은 낭만적인 동시에 슬프고 잔인하다. 원치 않은 이별로 끝나는 운명적인 사랑은 사랑의 운명이 부여한 절대성과 당위성에 맞먹는 상실의 상처와 무게를 당사자에게 남기기 마련이다.

엄밀히 말해 <로흐>는 운명적인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종족을 초월한 사랑의 추억이라 형언하는 편이 적절하다. 하지만 ‘운명의 상대’를 만나러 300만 광년의 거리를 건너 지구에 온 외계인(로흐브르흐흐로브 르브로)과 그 운명의 상대인 나(하루)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그전까지 잔잔하게 이어지던 두 사람의 관계 또한 순식간에 ‘운명’의 양면성을 띠게 된다. ‘운명의 상대인 당신을 만나기 위해 300만 광년을 건너 왔다’는 로흐의 고백은 극적으로 아름답고, 하루가 로흐와 함께 경험한 사랑의 교감은 더없이 찬란하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이들의 사랑은 일순간으로 끝나고, 둘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은 생각할 수도 없게 된다. 하루가 로흐와의 인연을 이야기하는 현재는 이미 그로부터 50년은 족히 지난 시점이다.

운명과 그 찰나성으로 인해 <로흐>는 아름답고도 슬픈 로맨스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슬픔 등 이 이야기가 지닌 힘은 운명이라든가 찰나성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로흐>가 인상적인 것은 이 이야기에 로흐와 하루의 관계가 극적으로 전환하기 전까지의 과정들이 있고, 이 모두를 기억하며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는 하루의 간절함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로흐에게 하루는 처음부터 ‘내 산호바다(운명의 상대)’였지만, 어쩌면 하루에게, 혹은 독자에게 로흐는 하루의 연애 상대라는 범주 바깥의 존재였을 것이다. ‘인간형’이며 인간처럼 고도의 지성과 감정을 지녔지만 지구인과는 생김새도 신체 조건도 다르며 3차 성징이라는 신체 변화를 앞두고 여성체에 가까운 자웅동체 상태로 있는 외계인은 21세기 현대에나 이 소설 속 먼 미래에나 지구인에게는 무척이나 이질적이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연애 상대로서의 가능성을 생각할 이유가 없는 룸메이트로서의 로흐를 하루는 세심히 지켜봐 왔고, 룸메이트로서의 로흐는 하루를 속 깊게 세심히 배려해 왔다. 사랑의 가능성이 쌍방향이 아닐 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 왔다. 과연 그 시간들 없이 ‘운명’이라는 이유만으로 두 사람 사이에 교감이 성립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성립했다 해도 독자들이 이에 공감할 수 있었을까.

로흐브르흐흐로브 르브로, 줄여서 로흐라는 외계인의 (지구인과 대비되는) 특수한 신상들에서 시작해, 로흐라는 존재, 하루가 로흐와 보낸 시간들, 사랑의 교감과 이별, 일말의 희망이 어린 소망은 하루의 시점에서 섬세하게 서술 및 묘사된다. 이를 끝까지 읽고 나면 로흐라는 존재가, 로흐와의 짧은 인연이 하루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 하루가 오랜 세월 동안 이를 얼마나 내면에 깊이 새겨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재회의 가능성조차 없이 찰나로 끝나 버리는 ‘사랑의 운명’은 덧없고 슬프다. 하지만 그것이 순간의 빛을 발하도록 차곡차곡 쌓여 광원이 되어 준 앎(탐색)의 시간들과 더불어, 이것은 ‘이번에는 내가 당신을 찾아내고 싶다’는 가망 없는 소망을 포기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 값지고 찬란한 직/간접적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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