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습니다.
<어느 라면평론가의 죽음>은 기묘한 소설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는 마법의 말을 찾으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도저히 문장 비슷한 말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이럴 때는 요약의 도움이 필요하죠. 스토리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자살을 막는 국가 공무원입니다. 그리고 이창섭 씨는 그런 직업이 있을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라면평론가입니다. ‘나’는 이창섭의 죽음을 막기 위해 그의 집으로 향하다가 사고를 당합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살아남은 나는 이창섭의 집으로 향하고, 그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나’가 사고를 낸 차량에는 이창섭 씨의 딸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중상을 치료하다가 병원에서 몸을 던져서 자살합니다. 이창섭 씨는 장례식장에서 나에게 화를 내고, 그 때부터 ‘나’는 차를 직접 몰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에는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람을 막지 못해서 직위 해제된 ‘나’가 이창섭 씨를 만나러 가는 결말로 소설은 끝납니다.
아마도, 라면의 본질에 대한 물음 속에 작품으로 향하는 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소고기 라면을 끓여준 이창섭 씨에게 묻습니다.
“그럼 소고기라면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이창섭 씨는 대답합니다.
“소고기가 없는 것이 본질이지요.”
소고기가 없는 것이 라면의 본질인 것처럼, 작가님이 그리는 미래 사회에서도 인간이라는 본질은 ‘인간 없음’으로 대체됩니다. 고장난 차를 끌고 가기 위해 구급차가 움직이기도 전에 차량을 끄는 견인차, 자살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유품정리업체 차량,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고의 과실을 인간에게 지우는 자율주행 프로그램, 자살할 사람 중에서 구해야 할 사람을 고르는 정부의 자살 예측 프로그램 등등. 이러한 사회가 우리가 맞이해야 할 미래의 사회라면 차라리 살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고, 작가님은 값싼 인스턴트 식품이지만 역사가 깊은 라면의 맛을 평론하는 이창섭 씨의 입을 빌려서 말씀하는 것만 같습니다. 언제나 냉철한 ‘나’가 자살을 막지 못하는 마지막 장면은 어쩌면 이창섭 씨의 호소에 대한 ‘나’의 응답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기묘한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