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새로운 시각으로 본 좀비물’이라는 것이였다.
하지만 리뷰를 쓰려다보니, 다른 이들이 이미 ;새로운 시각’에 대한 언급을 많이 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글을 다 읽은 후 많이 남은 여운은, 생명의 경중. 그리고 삶의 질에 대한 부분이였다.
나는 생명의 경중과 삶의 질에 초점을 맞추어 리뷰를 하고자 한다.
이 글의 주인공에게는 좀비인 어머니가 존재한다.
주인공과 언니는 좀비인 어머니를 숨기기 위해 그녀에게 재갈을 물리고, 방음벽을 설치했다.
그리고 개사료를 먹이고, 어머니를 관리하는 메뉴얼을 둔다.
한편, 주인공은 좀비요양원의 보안요원이다.
보안요원이라고 하지만, 그곳에서 하는 일이란 많지 않다.
그저 유리막 너머의 좀비를 바라볼 뿐이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무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어쩌면 어머니를 집에 방치하는 것도 주인공이 유리막 너머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좀비요양원은 애초에 좀비를 일종의 병이라고 생각해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 따위의 의미가 들어있지만, 그 내면에는 그저 바라보는 것 뿐이다.
단언컨대, 나는 이 글에서 만들어진 좀비요양원을 ‘인간의 어설픈 동정의 세계‘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글에서 좀비는 사회적 약자이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국회는 사회적 약자인 좀비들을 위해 요양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요양원에서 그저 숨을 쉬고 있다는 것 뿐인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명의 경중이 논의될 수 있는 것인가.
오히려 생명의 경중 보다는 삶의 질을 살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명의 경중은 분명 언제나 논란이 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삶의 질 앞에서, 생명의 경중은 무의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