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어두운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일반화할 근거까지 가진 건 아니니, 다소 여유롭게 말해보자면 ‘어두운 이야기는 수요가 있다.’
팥쥐를 젓갈로 담가버린 콩쥐 이야기나, 자매들에게 불에 달군 구두를 신게 한 신데렐라 이야기 같은 것들.
4대 희극보다 유명한 4대 비극.
진흙에서 피는 연꽃
어둠을 통해 빛을 드러내는 이야기 같은 것.
낮이 되면 별은 보이지 않는다. 별의 반짝임을 알 수 있는 건 칠흑처럼 어두운 밤일 때 뿐이다.
심연을 바라보면 심연도 당신을 바라본다는 얘기도, 왜 경구로 삼는가 하면 심연에 끌리는 일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메타포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수없이 많이 볼 수 있다.
“그 말은…… 달이를 데려가겠다는 거야? 그건 안 돼.”
“정말? 정말 안 돼?”
달토끼가 눈을 맞추어왔다. 그 순간, 뭔가에 꿰뚫린 것처럼 소름이 쫙 돋으면서 달이를 원망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모성애를 건드리는 것도 그런 것에 해당한다. 이를테면 좀비 영화를 보면 엄마가 좀비가 돼서 방금 전까지 끌어안고 있던 자식을 물어뜯는 장면 같은 것을 보게 될 때도 있다. 그런 장면은 길게 다뤄지지 않지만, 비슷한 패턴으로 자주 쓰이는 레퍼토리인 만큼 효과적이다.
왜 이런 것이 많은 것일까?
생각해보면 이게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라서 그런 것 같다. 어쩌면 나도 저런 상황에 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은 저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지만, 저런 상황에 처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주인공의 입장도 그렇다. 선택을 미룰 수는 없다. ‘달이를 보낼 것인가 품을 것인가.’
선택을 미룬다는 행동 자체가 이미 ‘품고 있겠다는 선택’이기 때문에, 선택은 불가피하다. 이때 이 선택은 주인공은 물론 독자의 윤리관도 시험한다.
그리고 ‘진흙’에서 피는 연꽃처럼, 진흙을 보여줬으니 그럼 이 작품은 ‘연꽃’으로 무엇을 드러내느냐 하면, 바로 ‘본성’이다.
자신을 위해 아이를 버리려고 했다. 나중에는 그것이 아이를 위한 것이 되기도 하지만, 첫 시작은 자신이 힘들어서다. 그렇다. 이는 분명 이익 추구에 따른 마음이다.
그래서 작품을 읽으며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윤리관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다. 모성애로는 감춰지지 않는 선명히 드러난 본성이다.
그리고 그렇게 선명하기 때문에, 비로소 거기에 자기 자신을 비춰볼 수 있다.
만약 주인공의 모성애만 드러내며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달이를 품었다면, 나는 아무 생각 없었을 것이다.
그때 모성애는, 거울에 낀 먼지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먼지를 닦아내고 맑은 거울을 내밀었다. 거울이 필요하다. 거울에 자신을 비춰 스스로를 되돌아본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소설 속 모성애가 아닌, 독자 스스로의 본성을 가다듬을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달이’라는 이름은 적절하다. 달이야 말로 태양을 비춰주는 가장 큰 거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