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점이 좋지 않았다, 그에게는. 먼 길을 서둘러 갈 필요도 없고, 자신이 애정을 쏟으며 보듬어줄 마음의 공간이 없는 사람이었다.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갈 수 있도록 더 빨리, 쾌적하게 만들어 놓은 곳을 포기하고, 허허벌판의 들풀을 볼 수 있는 속도, 거리를 재어가며 갈 수 있는 차에 탑승해 마음을 다스리기에 바빴다.
도착지에 도착한 그는 자신이 엄마와 함께 살았던 곳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차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지만, 남자는 해묵은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어린 날의 나, 그를 대하는 엄마의 사나운 목소리. 한 번도 모듬어주지 않는 모성과 자해에 가까운 몸짓이 그를 아찔하게 했다. 붉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이 연신 붉은 생채기를 내는 작업은 그녀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의 소년에게도 상처로 남았다. 누군가 왜 그러는지 물어보아도 단숨에 그녀의 행동을 막아줄 이는 없었다.
‘익숙하다’는 것은 때로 일을 능숙하게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어떤 것을 봐도 왠만해서는 놀라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통용되는 것 같다. 아그책님 작품 <막차>는 익숙한 주제와 분위기, 주인공이 왜 막다른 골목으로 생을 몰고가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선택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의 부모는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어그러진 만남이었다. 한쪽의 일방적인 폭력. 저항 할 수 없어 일방적으로 당했던 폭력으로 생긴 아이가 바로 그였다.
처음부터 시작이 좋지 않았으니, 마음 또한 그녀의 아이에게 주지 않았다. 폭력의 증거일 뿐 그에게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 조차 절망스러웠을테니. 그렇게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폭력의 시작은 주위로부터 멸시로 그의 가슴 속에 불길을 당겼고, 그는 지난날 지옥 속으로 다시 걸어간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파멸의 길로. 피해자였던 이가 가해자로, 가해자였던 이가 피해자로 뫼비우스 띠처럼 돌고 도는 것 같다.
너무도 익숙한 그림의 이야기였지만, 한 남자의 어두운 이야기를 차를 타는 시간에 비유해 그린 것은 인상적이었다. 쎄하면서도 차가운 성질의 금속같은 한 남자의 어두운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