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를 찾는 방법; 일상에서 길어 올린 범우주적 상상력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열대야 (작가: 홍윤표, 작품정보)
리뷰어: 파란펜, 18년 12월, 조회 100

소설을 쓰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정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글감, 바로 소재이겠지요. 어떤 이들은 소재는 무척 잘 떠오르지만 플롯을 짜다가 고전할지도 모르고, 또 다른 이들은 도통 소재부터 떠오르지가 않아서 고투할지도 모릅니다.

조심스럽게 예상해 보자면, 후자에 해당하는 이들은 소재의 참신함이나 주제와의 조응을 깊게 고민하는 작가들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좋아하는 SF작가인 레이 브래드버리는 <민들레 와인>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내 책이나 단편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이 책 역시 뜻밖의 선물이었다. 이런 놀라운 선물을 얻는 법을 나는 아주 젊어서 배웠다. 그 전에는 여느 초보자나 마찬가지로 나 역시 두들기고, 때리고, 도리깨질해야 괜찮은 생각이 떠오른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면 설사 그럴싸한 생각이 떠올라도 그것은 앞발을 들고 벌렁 누워 영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죽어버렸다.”

 

흡사 냉동 창고에서 동사한 개를 연상케 하는 저 마지막 문장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이 개를 어떻게 부활시켜야 할까요? 레이 브래드버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20대 초반에 단어 연상을 하게 된 것은 정말 운 좋은 일이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책상으로 걸어가 앉아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단어들을 쓴다. 그 단어들을 가늠하고 그것이 내 인생에서 지닌 의미를 보여 주기 위해 다듬어 가다 보면 작중인물이 생겨난다. 놀랍게도 한두 시간 후면 새로운 이야기가 완성되곤 했다.”

 

그렇군요. 그러나 레이 브래드버리는 천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이 가능했는지도 모릅니다.

브래드버리 같은 천재가 아닌 범인들을 위한 장르소설 작법서를 뒤져 보았습니다. 네 권짜리 시리즈 중 하나인 <Now write : 공포, 판타지, SF>에서는 소재를 떠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아래와 같은 것들을 제시합니다.

-목가적 낱말 열 개, 기술적 낱말 열 개 중에서 하나씩 단어를 뽑아서 단편을 완성해 본다.

-사진집과 미술 관련 서적을 본다.

-서로 연관될 일이 전혀 없는 것들을 억지로 연결해 본다.

 

소설 <열대야>는 바로 이 마지막 방법에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서로 연관될 일이 전혀 없는 것들을 억지로 연결해 보는 겁니다.

 

평범한 회사원인 주인공은 어느 날 양말 한 짝을 잃어버립니다. 세탁기와 건조대 근처를 샅샅이 뒤져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죠. 며칠 뒤엔 차키를 잃어버립니다. 세탁한 바지 주머니에 있어야 할 차키가 어찌된 영문이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그 뒤로도 영수증이나 명함, 단추 등을 연달아 잃어버립니다. 분실물들의 공통점은 세탁기에 넣고 돌린 뒤 사라져버렸다는 점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세탁기 안에서 명함 한 장을 발견합니다. 거래처의 명함이었죠. 그러나 뒷면에 이상한 말이 쓰여 있습니다. 이백억 광년이나 떨어진 행성의 외계인이 그에게 보낸 메시지가요. 주인공은 외계인과의 대화를 시도하기로 결심합니다. 바로, 세탁기를 통해서요.

 

세탁기와 외계인이라는 소재는 서로 연관성을 찾을 수 없는 소재입니다. 외계인과의 조우에 관한 수많은 책과 영화가 있지만, 세탁기를 통해 만난 사례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선 세탁기가 중요한 통로로 이용되지만, 외계인과의 교신에 사용된 사례는 아니었고요.

 

‘퍼스트컨택트물’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외계인을 처음 맞닥뜨리는 장소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열대야>는 일상적인 장소에서 범우주적인 상상력을 길어 올리는 탁월한 작품이었습니다. 주인공이 받은 선물이 마치 저에게 전달된 선물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저는 글쓰기의 해법은 멀리 있는 것 같지 않다는 댓글을 달았고, 작가님은 시야가 넓지 못해 주변에서 소재를 찾을 뿐이라는, 겸손이 넘치는 답글을 남겨 주셨습니다.

글쎄요. 저 역시 과거의 어느 때, 허름한 고시원 다용도실의 고장 난 세탁기를 붙잡고 서서, 오랫동안 세탁조를 들여다보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시원 총무는 세탁기가 고장 난 것 같다는 제 말을 믿지 않았고, 저는 왜 하필 제 빨래만 시커먼 기름이 묻은 상태로 나오는 것일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었지요.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세탁조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때인데, 저는 아무런 영감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무언가 오묘하고, 무언가의 통로가 될 것 같은 이상한 기운을 품고 있다는 생각에서 그쳤지요.

그때의 희미한 상상력은 소설 <열대야>를 따라 걷다가 이국의 먼 섬으로까지 날아갔습니다. 섬세하게 가공된 엔딩부는 독자인 저를 안락한 목적지로 안내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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