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드라마 <청춘의 덫> 명대사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널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어’라는‘사랑’(정확하게는 폭력)이 있지요. 그러나 문영은, ‘널 가지기 위해 부숴 버리겠어’ 혹은 ‘부서진 너를 갖겠어’라고 할 사람이고, 결국 부서지는 사람입니다. 주인공인 문영은 ‘칼퇴근’하나만 보고 능력에 맞지 않는 회사에 입사합니다. 이는 거의 자기학대처럼 느껴집니다. 문영은 칼퇴근해서 고양이와 스스로를 고양이라고 하는 여자를 보살핍니다. 문영은 어릴 때부터 타인이 자신을 보살필 수 없고, 오직 자신이 타인을 보살펴야 합니다. 문영이 두려워 하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립’해서 문영의 보살핌을 받지 않아도 되는 독립된 타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문영은 자해와 상해(상대가 장애를 입어서 문영을 떠나지 못하게 할 정도로)를 하곤 합니다. 그것이 문영에게는 사랑입니다.
강렬한 자기파괴이며 지배욕과 소유욕이죠. 일반적이고 평범하진 않습니다. 문영과 ‘고양이 여자’의 과거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문영의 가족 얘기가 나오긴 하지만 문영이 어쩌다가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고양이 여자가 왜 스스로를 고양이로 믿는지도 구체적으로 설명되진 않습니다. 이 작품의 인물들은 ‘누가 더 미친 X인지’ 경쟁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혐오 혹은 공포 혹은 경외 입니다. 작가님이 독자에게 어떤 감정을 기대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인물의 과거, 배경을 제거해서 오히려 압도적인 인물의 위압적 면모로 독자를 전율케 하는 작품도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로서 욕심을 부리자면, 이 강렬하고 파괴적인 인물들의 ‘심연’을 보고 제압당하고 싶습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어렵다’고 느낀 건 단편임에도 여러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1인칭으로 말하는데, 화자/서술자가 누구인지 소제목이 달려있지 않은 ‘불친절함’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처음에 등장하는, 독자와 가장 비슷한 인물인(평범한 외부인) 지훈이 일관된 화자였다면 더 쉽고 친절한 작품이 되긴 했을 겁니다.
이 작품의 인물들은 ‘나’로 살지 않습니다. 문영은 ‘고양이 여자’를 떠나간 애인인 ‘은영’이라 부르고 고양이 여자를 데려간 병원에서 은영의 신분증을 내밉니다. 그러나 ‘고양이 여자’는 스스로를 (은영이 아니라) 문영의 고양이 코코로 여깁니다.고양이 여자와 문영은 ‘사랑의 방식’도 유사합니다. 문영이 은영을 찌르고, 고양이 여자를 괴롭히듯이 고양이 여자는 문영의 사랑을 나눠 갖는 고양이 코코를 죽이고 문영을 독점합니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는 외부로 데리고 나가 산책을 시켜줘야 하는 개와 달리 집안에만 있는 동물이고, 코코는 집안을 벗어나서 혹은 집안을 벗어나게 되어 죽습니다. 고양이 여자는 마지막에 스스로 문영이 됩니다. 은영이 문영에게 찔리고 나서 문영을 떠났다면 고양이 여자는 문영처럼 문영을 공격하고 문영의 옷과 이름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지요. ‘운명의 수레바퀴’ 처럼 문영과 고양이 여자와 고양이와 은영은 하나의 인물로 읽히기도 합니다.
고양이 여자는, 아니 문영은 이제 밤거리의 길고양이처럼 사냥감을 찾을까요. 아니면 박스 안에 웅크리고 또 다른 문영에게 주워지기를 기다릴까요. 타인을 부수고 자기를 파괴하면서 문영들은 결국 파국을 맞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