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니악의 단편 소설 <우주의 수수께끼와 그 해결 The Riddle of the Universe and Its Solution>에서는 이것을 ‘인간이라는 튜링 머신에 대한 일종의 괴델 문장’이라 부른다. MIT 인공 지능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집단 혼수 상태가 전염병처럼 퍼지는데, 그들이 접촉한 문장이 무엇인지 조사하려면 조사자 역시 문장에 의해 혼수 상태에 빠지므로 결국 이 ‘괴델 문장’은 끝내 미지의 것으로 남는다.
우리의 상황은 더 나쁘다. 단지 우리 뇌에 괴델 문장을 입력시키지 않는 것만으로, 이를테면 네크로노미콘을 피하는 것만으로 우주적 대공황을 벗어날 순 없다. 별들이 제자리를 찾고 르뤼예가 태평양 위로 떠오르면 어찌 됐건 크툴루는 깨어난다.
<크툴루의 부름>은 어마어마한 반지성 선언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무지라는 평온한 외딴섬에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무지를 벗어나기 위해 더 멀리 항해하려 할 것 없다. 무지를 벗어나 봤자 끔찍한 현실만이 있을 뿐이고, 안다고 운명을 벗어날 수도 없다. 이런 세계에선 오히려 무지하다는 사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다행스러운 일’이다.
거대 괴수의 물량 공세는 중요하다. 얕은 잠의 70 계단 아래 문지기 나스트와 카만-타의 시험을 거친 뒤 다시 깊은 잠의 700 계단을 내려가야 도달할 수 있는 드림랜드의 주문에 걸린 숲과, 위스콘신 북부 어둠 속에 꿈틀거리는 니알라토텝의 지상 거주지 은가이 숲, 태평양 아래 잠들어 있는 르뤼예와 같은 신화적 세계의 우주 규모급 경이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이 우리를 전에 없는 공황으로 몰고가는 것은 단연 저 단호한 반지성 선언에 있다. 지성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인류의 신화는 틀렸다. 맞닥뜨릴 지식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떠드는 순진한 소리다.
<니알라토텝>의 화자가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과학적인’ 인물인 것도, <벽 속의 쥐>의 화자가 ‘미신에 불과한 전설과 민요에 큰 반감을 가진’ 인물인 것도, <금단의 저택>의 조사자들이 ‘과학적인 연구와 성찰의 자세로 임하는’ 것도, ‘모든 것을 책으로 배운’ <아웃사이더>도- 인류 보편을 훌쩍 뛰어넘은 수준의 지성조차 끔찍한 현실 앞에 백기를 드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한 포석에 불과하다.
비극은 인간 지성이 빠지기 쉬운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지성을 빙자한 다른 어떤 것 때문도 아니다. 러브크래프트의 세계에선 그냥 지성 그 자체,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인간 본능 그 자체가 비극이다.
문명화된 도시의 삭막한 풍경에 지쳐갈 때쯤 예스러운 길을 발견했다면 그곳에 대해 알고싶지 않겠는가?<그> 유독 이상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어간 저택의 비밀을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금단의 저택> 센티널 언덕에서 거대한 섬광이 번뜩인 할로윈 직후의 자정, 불과 생후 11개월의 나이에 ’요그 소토스’를 울부짖었던 거구의 사내. 그를 둘러싼 내막이 어떻게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더니치 호러>. 지도에 없는 도시에 대한 호기심이<인스머스의 그림자>, 방대한 화석 발굴을 위한 시추 작업이<광기의 산맥>, 세계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정말로 단지 실수일 뿐인가. 지식을 얻는 데 성공한들 ‘성공의 희생양’이 될 따름인가<저 너머에서>, 그러니까 대체 누가 블레이크를 죽였단 말인가.
물리학자 데이빗 도이치는 ‘설명이란 눈으로 보는 것의 근원이 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한 강력한 주장’이라고 정의한다. 체르니악은 묻는다. 괴델 문장이 인간을 혼수 상태로 만든다면 어떻게 혼수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면서 이것에 대해 경고하거나, 하물며 논할 수가 있을까? 자세한 경고를 하면 할수록 그만큼 위험도 같이 증가하는데.
그래서 ‘지옥을 보았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알만큼 지적인<픽먼의 모델>’ 러브크래프트의 주인공들은 함정에 빠진다. 그들은 지식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광기임을, 아우터 갓들과의 접촉이 낳는 코스믹 호러일 뿐임을 설명하고자 한다. ‘나 하나 미친 사람으로 몬다고 모든 것이 설명되진 않는다<현관 앞에 있는 것>’며, 그것은 이성과 지성, 정의라는 ‘환상을 충족하기 위해 희생자를 하나 만들겠다<랜돌프 카터의 진술>’는 발버둥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경고가 자세할수록 더 많은 지식을 담게 되고, 위험도 같이 증가한다. 경고가 담고 있는 정보량의 위험 수준을 낮추면 ‘사람들은 저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벽 속의 쥐>.’
체르니악은 이것을 ‘인간이라는 튜링 머신에 대한 일종의 괴델 문장’이라 불렀다. 일단 인간 정신에 침투하면 돌이킬 수 없는 공황을 일으키는 어떤 지식.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자들은 경고한다. 알려하지 말라. 너희도 안다면 알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왜 알면 안 되는 것인지, 알지 못하기에 알고자 하리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 지성의 악몽이다. 서로 꼬리를 물고 무한히 도는 명제의 폐쇄 회로 속에서, 무지를 택할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끝내 지식을 택할 인간. 마치 ‘정체 모를 교도관들에게 이끌려 익숙하고도 확고한 운명으로 한 발 한 발 걸어들어가는 사람들<우주에서 온 색채>’처럼.
그래서 다른 어떤 독자보다도 지성을, 이성을, 합리성을 믿는 자들에게 러브크래프트는 역사상 전례 없던 악몽을 선사한다. 러브크래프트의 세계에서 지식은 무지의 우위에 있지 않다. 오히려 지성주의 자체가 무지의 소산이다. 알게 된 자들의 광기가 전염병처럼 퍼져나가는 가운데 우리는 무지라는 외딴 섬에 머물고 있으며, 지식의 망망대해 가장 깊은 곳엔 지금도 크툴루가 잠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