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함이 있는 사람이 서로를 사랑으로 구원할 수 있다면 감상 브릿G추천

대상작품: 안녕 베토벤 (작가: Victoria, 작품정보)
리뷰어: 도련, 18년 8월, 조회 11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리지 않습니다.

저는 친절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니 다음의 소설을 끝까지 읽고 와주세요.

혜린의 외할머니가 나오는, 연결되는 다른 중단편 작품도 읽어주시면 제가 감사. 압도적 감사!

 

날이 너무 더워서 맥북이 오작동을 두 차례 일으키고 개님은 바닥에 축 늘어지는 그런 날씨입니다. 제가 뭘 치는지도 모르겠네요. 며칠 째 실내가 32.5도를 꾸준히 유지하는 기념으로 언젠가는 쓰리라 벼르고 또 벼르던 이 리뷰를 쓰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다른 작품의 리뷰를 먼저 쓸까 했지만 공지를 보니 퇴고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어쩌겠어요, 다 운명이죠. 이걸 먼저 쓰라는 뜻입니다. 암요.

주인공 중 한 명인 주영은 조증, 즉 양극성 장애 환자입니다. 꾸준히 입퇴원을 반복하는 것으로 보아 병식(=자신에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자각 혹은 인식, 정도로 이해해주세요)은 확실하게 있고, 조증의 기미가 보일 때 냅다 짐을 꾸려서 택시를 타고 병원을 찾을 정도로 자신의 병을 잘 아는 사람이네요. 조증이 낫기 어렵다는 사실도 잘 알고 그저 약 잘 먹고 제때 병원 가고 그렇게 관리하면서 살아가는 게 최선이라는 사실도 잘 아니, 제가 주영의 담당 의사 선생님이라면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환자 드물다고 남몰래 감격의 눈물을 훔치겠어요.

그러나, 이런! 프롤로그에서 주영은 제 발로 걸어온 주제에 입원하기 싫다며 그만 대난동을 피우고 맙니다.

날뛰는 환자 제압하는 일이 쉽지 않으니 (상상해 보세요. 쉽겠습니까?) 병원 직원분들께는 엄청난 민폐지만, 이해합니다.

저는 난동은 안 피웠지만 같은 병으로 폐쇄병동에 들어가 본 사람이니 그 안이 얼마나 답답한지 잘 알거든요.

이야기는 주영과 또 다른 주인공, 혜린의 시점과 번갈아 진행됩니다.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눈치챌 수 있지만, 혜린은 베토벤이 자신의 머리 안에서 말을 건다고 망상을 하고 환청을 듣는 조현병 환자이고요. 주영과 혜린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진행된다고 썼지만 아무래도 이 이야기에서 초점을 맞추는 대상은 혜린 같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전형적인 남성향/여성향 로맨스라기보다 사랑을 통한 혜린의 성장과 치유기로 읽었는데요, 그 까닭은 매우 단순합니다. 주영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지만 혜린은 이 이야기에서 변하는 주체거든요.

혜린이 의사와 면담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혜린은 자신의 병과 대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밝혀지는 과거는 얼마나 가혹한가요.

인생은 온통 강압적인 어머니에게서 받은 상처투성이, 돌아가신 할머니가 안식처였지만 완전한 그늘은 될 수 없죠. 어차피 사람은 언젠가 떠나가게 마련이고, 혜린은 참담한 방식으로 할머니와 이별했습니다. 사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별한 것도 아니에요. 말씀드리는 그대로, 떠나보내지 못한 것이죠. 콩쿨 때문에 장례식조차 가지 못했으니까요.

여기서 문제 하나.

사람은 왜 죽으면 장례식을 치를까요?

저는 오랫동안 그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사실 전 사람 중에서도 속편하고 생각이 없는 부류라, 장례식에 대한 인식이 오랫동안 고작 이 정도에 가까웠거든요.

<잘 모르겠지만 장례식장에서 먹는 음식은 맛있다. 가능하다면 한 그릇 더 먹고 싶다. 요즘에는 다 상조가 있어서 내가 일을 다 안 해도 되니까 생각보다 훨씬 더 편하네. 앗싸! 때마침 저기서 배고플 테니 뭣 좀 먹으라고 나를 부른다! 기회가 왔으니 좀 더 먹고 힘내자! -끝->

그러나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임종을 지키는 것도, 장례식을 치르는 것도, 빈소에 가서 조문을 치르는 것도 결국에는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닐까요.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떠나보내기 위해, 언젠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이별을 제대로 맞아들이기 위해, 무엇보다도 남을 수밖에 없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의식을 치르는 것입니다.

혜린은 주영과 나누는 감정의 교류를 겪고 사랑하는 사람을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했던 자신과 마주합니다. 할머니의 추억이 서린 회중시계를 수리해, 역시 할머니의 추억이 서린 귀이개로 시침과 분침을 갈아끼워주는 장면은 얼마나 상징적인지요. 주영은 시계를 수리해준 것이 아니라 혜린의 마음을 수리해 준 것입니다. 혜린이 그 다음 처음으로 주영에게 자신의 환청을 고백하는 것도, 그리고 의사에게 자신의 증상을 이야기하며 병과 마주하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강한 사람만이 병과 대면할 수 있고, 자신의 병과 직면하는 것은 치유의 시작이니까요.

정신병동 체험 당사자로서, ‘정신병동 안에서의 로맨스’란 이야기를 들으면 전 사실 제일 먼저 이런 생각이 듭니다.

“까고 있네, XX 떨지 말고 꺼져라! 선동과 날조는 챙피하니까 꺼져버리란 말이야!”

– 만화 <데빌맨> 해적판, 미키의 유명한 대사에서 제 절절한 심정을 좀 따왔습니다. –

왜 이러는지는 자세히 말할 수 없어요.

다른 환자의 프라이버시와 관계된 문제니까요. 다만 제가 그런 걸 목격했고 결말이 매우 안 좋았더라… 정도로만 밝히고 말을 아낄게요.

실제 병동에서는 환자들이 밖으로 나가도 서로 연락하지 못하게 합니다. 심지어 밖으로 나가면 의사에게 부탁하더라도 말조차 전하지 못해요. 들어주지를 않았죠.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가 알기로는 이 소설과 달리 면회는 직계 가족 외에는 올 수 없을 테고…… 뭐, 그렇네요.

저에게 연락처를 몰래 적어서 주신 분이 있었는데 고민하다가 버렸던 기억이 나요. 파졸리니의 소설에 끼어서 보관해 놓았는데.

병동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때는 이런 말을 들었죠.

“우리 말 참 잘 듣는다. 이렇게 만나서 떠드는데 폰 번호도 교환을 안 하잖아.”

그게 규정이고, 사실 규정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에요. 사고가 날 수 있고 인명이 걸렸으니까 규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병동에서 만난 환자가 서로 모여봤자 병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환자들은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고, 영향을 미칩니다. 개중에는 좋은 것만 있지 않아요. 우리도 살아가면서 안 좋은 만남 하나 둘은 겪지 않나요. 비슷한 겁니다. 좁은 병동은 시시각각 변하고 어떤 환자는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망상에 시달리며 독방에 가지요. 자조 모임의 효용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제대로 된 치료 없이 그저 서로 모여서 도닥인다고 한들…… 유감스럽게도 병은 치유되지 않아요. 그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꿈을 꿀 수 있고, 가끔은 이런 환상도 괜찮지 않을까요.

우리는 모두 결함이 있어요.

꼭 병이 있지 않더라도 말이에요.

그럼에도,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서로를 사랑으로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일일 터이고,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기적일 것입니다.

 

 

+ 말 잘 듣는 착한 환자분들은 귀이개나 드라이버처럼 위험한 물건은 그냥 병동에 가지고 들어가지 맙시다. 정말로 위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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