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세계전생물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다. 자주 보는 편이기도 하고, 내가 재밌게 본 것 중에 인기가 없었던 작품도 별로 없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꽤 자신을 갖고 단점이나 장점에 대해 지적할 수 있는 장르가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47화까지를 하나의 작품으로 봤을 경우, 다소 사두용미의 기질이 보인다.
사두라고 말한 것처럼 이 작품은 초반부가 미진하다.
잠시 얘기를 되돌리자면, 여러 작품을 보다보면 1, 2화부터 쭉 독자를 사로잡는 ‘재밌는 초반부’란 걸 보는 경우가 있다. 유명한 영화로 예를 들자면, ‘매트릭스’의 경우에는 매트릭스의 존재를 깨닫기 전인 영화시작 10분, 20분부터 이미 다른 평범한 스릴러영화의 가장 긴장감이 고조되는 부분보다 재밌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매트릭스 외에도 초반부부터 재밌는 작품들을 보다가 깨달은 건 이런 재밌는 초반부는 대게 두 가지 경우로 나뉜다는 점이다.
첫 번째는 초반부터 반전이나 신선한 소재, 그 외의 다른 임팩트를 줬기에 재밌는 ‘실질적으로 재밌는’ 초반부다.
두 번째는 별 특이할 건 없는데도 ‘잘은 모르겠지만 앞으로 뭔가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감정을 갖게 만드는 초반부다.
후자는 신묘한 경지라고밖에 할 말이 없고, 전자의 경우는 왜 재밌는지 설명하기가 쉽다. 소재가 매력적인 작품의 대부분이 이에 속할 거고, 드물지만 내러티브로 승부를 보는 작품도 있다.
이 작품의 초반부에서 두드러지는 문제점은 ‘컨셉의 부재’다.
어떤 ‘밀고 있는 컨셉’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소재는 많은데 못 살리고 있는 걸로 보인다.
우선, 이랄 것도 없이 이것 하나만 만회해도 훨씬 재밌어질 거라 생각한 단점이, 주인공이 연구원이란 점을 전혀 못 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연구원임에도 불구하고 대검을 들고 싸운다. 차라리 무림에서 환생한 고수였던 편이 검 들고 싸운다는 전개에 더 개연성을 실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연구원이니까 연구원만의 뭔가를 보여주는 편이 좋았을 텐데, 주인공이 이세계에서 보여주는 행보는 뭐 서점 직원을 데려오건 학원 강사를 데려오건 다 할 수 있는 것들밖에 없다. 검을 들고 싸운다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이를테면 달빛조각사를 보면 주인공은 검으로도 싸우는 것 못지않게 조각도 많이 한다. 둘 다 재밌긴 하지만 관심끌기 좋은 건 어느모로보나 조각 쪽이다. 그랬기에 47화까지 봤을 때 이건 타당하다 싶었던 전개는 송부장에게 복수하는 파트 하나뿐이었다.
또 하나 꼽자면 주인공이 언데드인 점도 그다지 못 살리고 있다. 언데드인 만큼 좀 더 어두운 쪽으로 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언데드가 주인공인 유명작들은 대게 어두운 분위기를 띈다. 왜냐면 그 편이 타당하고 언데드라는 소재 본연의 맛을 더 잘 살린 노선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노선을 따라가지 않아도 좋은 작품이 나올 순 있지만, 지금 이 작품에는 굳이 소재 본연의 재미를 죽여 가면서까지 추구할 만큼 재밌는 전개는 보이지 않았다. 특히, 언데드이기에 생기는 재미를 더 살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굳이 인간화라는 요소까지 넣어서 무효화시킬 필요가 있었을까는 의문이다.
그래도 한 가지 기대를 걸고 있는 점은 언데드의 몸을 흡수할 수 있다는 설정이다. 처음 봤을 때는 이제 계속 더 강한 몬스터를 잡으며 몸을 업그레이드 해가는 방향으로 갈 것인가 생각했는데, 아직 윤곽만 잡아놓은 상태라 확실한 한 방은 없긴 하다. 그래도 점점 틀이 갖춰지는 게 가속화되기 시작하면 재밌을 것 같다. 앙신의 강림의 망혼벽 같은 느낌.
약간 사족일 수도 있지만 또 한 가지 꼽자면, 이건 순전히 저번에 읽었던 작품 때문에 생긴 의문점인데, 페란듀일이란 캐릭터를 왜 넣었는지가 의문이다. 말 그대로 얘는 주인공이 느끼는 대로 ‘짜증나는’ 캐릭터인데, 왜 넣은 건지, 정확히는 왜 이런 성격으로 설정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과몰입을 하는 편인지는 모르지만, 짜증나는 캐릭터를 보면 짜증이 난다. 짜증나고 싶어서 소설을 보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이 캐릭터 빨리 안 사라지려나 라는 생각만 하게 되는데, 동료로 편입되는 걸 보고 절망했다. 페란듀일에 비하면 송부장은 보면서 힐링할 수 있는 캐릭터다. 송부장은 적이니까. 적은 짜증나게 행동해도 괜찮다. 언제 X돼게 할까 기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동료는 안 된다(그렇기에 브레이킹 배드와 워킹 데드를 보고 탄복했다).
정리해보자면, 앞서 말한 모든 문제점들은 결국 ‘가볍게 쓴다’는 접근법이 문제가 된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문체를 가볍게 쓰면 이세계물 독자들의 취향에 맞겠지. 이 음식은 간이 세니까 물 좀 타면 되겠지..물론 그렇게 해서 맞을 때도 있지만, 그것보단 이세계물 독자들의 취향에 맞추기 위한 전력을 좀 더 정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세계물의 전개를 도식적으로 따라간다는 느낌이라 그만한 재미는 하지만, 이 작품은 아무래도 전력을 다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