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해안도로를 달리는 차 안. 저는 핸드폰으로 리뷰 공모 게시판을 살피고 있었습니다.
내일이 마감인데 리뷰가 하나도 달리지 않은 작품을 발견했습니다. [순례길]이었죠. 늘 그렇지만 별 기대없이 한 번 읽어보기나 할까하고 1회를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일단 10점을 눌렀습니다. 다음 회를 읽었죠. 그 다음 회, 다음 회… 하고 끝까지 읽어버렸습니다.
기본이 잘 갖춰진 깔끔한 이야기
[순례길]은 알 수 없는 과거를 지닌 채 순례길에 오른 흑발 여자 ‘미르’와 함께하게 된 “성격이 지랄맞은” 금발 안내자 ‘칸’의 이야기입니다. 로맨스가 붙어 있지 않지만 사랑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부터 “깔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로도 그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잘 다듬어진 작품이었습니다. 기본이 잘 갖춰졌다고 할까요.
주저리주저리 설명하지 않고 의문을 남기는 도입부.
한 회 한 회 그 자체로 완결되고 재미있으면서도, 계속 전진하는 이야기.
자연스럽게 녹아든 복선들과 조금씩 드러나는 진실.
감각적이면서도 인물의 반응을 그려내듯 보여주는 문장들.
담담하면서도 가슴 아픈 사연과 분위기…
…네. 사실 제가 딱 좋아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더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요.
이제부터는 스포일러입니다. 안 읽으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시죠.
정석적인 플롯…이 따뜻하게 느껴진 이유
순례길은 여러가지로 정통적인 길을 걸어갑니다. 이야기는 예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죠. 단편적인 복선들만 가지고도 뒷 내용을 쉽게 추리할 수 있었습니다.
미르가 정말 포기할 것 같은 위험한 순간이 되면 항상 칸이 나타납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이지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독자도 미르도 사실 칸이 와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니까요. 언젠가 올 거라고 믿었던 그 사람이 정말 와주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순례길]의 플롯은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선과 잘 이어져 있습니다.
칸은 처음에는 “술집여자”를 대하듯이 “인사”라며 미르의 볼에 쪽 소리를 냅니다. 당연하지만 미르는 불쾌해하죠! 독자인 저에게도 첫 인상은 최악이었습니다. 저는 배려심이 없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상대가 싫어하는데 능청스럽게 넘어가는 것도 싫어하고요.
하지만 치고 박고 싸우던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건 로맨스가 아니라도 인기 있는 공식입니다. [순례길]은 그 길을 따라갑니다. 다만… 순례길이니만큼 좀 독특합니다.
1회에서 “순례가 끝날 때까지 순례자와 운명을 함께할 것을 맹세한다.”고 했던가요. 그 말대로입니다. 순례자와 안내자는 묶여있기에 싫어도 함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두 사람은 싸우기도 하고, 사과하기도 하고,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하고, 몇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칸도 미르도 다른 면모들을 보여줍니다. 다들 말하지만 살아 있는 인간이니까요.
[순례길]은 깔끔하게, 그저 담담하게 이 모든 과정을 감각적으로 그려줍니다. 보리죽, 대금 연주, 안개 속에서 느끼는 추위… 저는 정말 칸과 함께 순례길을 걷는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어느샌가 미르가 칸을 사랑하게 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칸은 책임감 있는 사람이니까요.
잊혀진 과거와 함께 살아가기
역시 스포일러인데요. 결국 [순례길]은 멸망한 고대왕국의 왕족이 과거로 돌아가려 하지만, 결국 현재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주제는 다분히 교훈적이지만 이야기에 잘 녹아들어 있습니다. 잊혀진 과거를 상징하는 복선들이라던가요. “당사자”인듯 화를 내는 미르부터, 무너진 기와집, 나중에 “나는 이것과 같다”고 말하는 고대의 악기 ‘대금’, 안개와 순례길의 기원에 이르기까지…
작품 속에서도 이야기하지만, 미르가 살던 과거는 이미 사라져버렸습니다. 낯선 곳에 떨어진 미르는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하지만 미르는 과거에 집착하면서 현재를, 생명을 포기하려 합니다. 과거로 돌아가려 하죠.
보통 이런 이야기들은 “과거를 잊고 현재를 살아가!”라고 조언하죠. 하지만 과거를 ‘잊어야 한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폭력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따뜻합니다. 힘겨운 시간들을 상징하는 듯한 고통스런 안개를 지날 때 미르는 혼자가 아닙니다. 칸이 함께 있죠. 나중에 밝혀지듯 이 순례길과 안내자들은 친구(미르)가 안개를 쉽게 지나올 수 있도록 정령 친구가 만들어준 것이었죠.
미르는 칸과 함께 순례길을 헤쳐나갑니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미르는 과거와 현재의 기로에 서게 되죠. 과거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과거를 잊고 현재를 살아갈 것인가? 어느 쪽도 선택하기 어려운 모순입니다.
칸은 새로운 답을 제시합니다. 바로…
과거를 잊는 게 아니라 과거를 이어가는 것. 잊혀진 과거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것.
그 답은 누군가에게는 상투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칸은 “선택은 너의 몫”이라며 미르가 결정할 수 있게 해줍니다.
결국 미르는 (칸과 함께 하는 삶을 선택… 아니) 현재에 남기로 합니다. 칸이 말한대로 과거를 알리며 현재를 살아가기로 하죠.
삶의 의미. 서로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 사랑.
제가 요즘 리뷰를 쓰면서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사랑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제가 사랑 이야기를 쓰고 있기도 하고요. 힘겨운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건 뭐든 의미가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6년 전에 죽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삶이 힘들었고 제 삶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듯 느껴졌습니다.
그때 제가 살기로 했던 이유는 하나가 아니지만… 그 중 하나는 죽어가는 것들을 하나라도 구할 수 있다면 제 삶은 의미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따금씩 우스갯소리로 공장에서 일하면서 가난한 나라에 매달 30만원씩만 보내도 살아갈 가치는 충분하다고 하곤 하죠. 중3 때는 정말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사람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삶은 힘겨우니까요. 혼자서 고통스러운 안개들을 헤쳐나갈 수는 없습니다. 정령들에겐 장난일 뿐일지라도, 나한테는 생명의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그 힘들었던 중3 때 한 여자아이를 남몰래 좋아했었습니다. 매일 수업이 끝나면 그 애가 있는 교실 창문에 가서 몰래 얼굴을 보고 도망치듯 학교를 뛰쳐나갔죠. 물론 그 사랑은 반쪽짜리였고 저는 결국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죽으면 그 아이를 볼 수 없기에… 저는 그래서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한 가지 더 있”1었던 거죠.
힘겨운 세상을 헤쳐나가려면 정령들의 장난을 즐기려면… 누군가 도와줘야 합니다. 안내자가 필요하죠.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해줄 수 있으며 함께 살아갈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낯간지럽지만 사랑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칸 같은 사람을 기다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누군가에게 안내자가 되어주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순례길을 만들었던 그 정령 친구처럼요. 사람들이 안개 속에서 헤매지 않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이 좋았습니다. 깔끔하면서도 따뜻한 이야기라서요. 이런 이야기를 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