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이상향과 섬 공모 브릿G추천 공모채택

대상작품: 우리들은 언제나 섬에 살았다 (작가: 샤유, 작품정보)
리뷰어: 코르닉스, 18년 4월, 조회 63

게으른 감상입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SF는 과거부터 먼 미래까지 다양한 시대를 아우릅니다. 때로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수없이 많은 상황과 배경을 제시하기도 하고 인간의 경계와 한계를 건드는 다양한 질문과 소재를 다루기도 합니다.하지만 그 속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맞닥뜨린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제가 SF를 좋아하는 까닭 중 하나는 그게 결국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인간에서 멀어진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 소설은 하나의 상상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입니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면 어떻게 될까? 소설에서는 이를 위해 상당히 그럴듯한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대지진으로 원전이 붕괴되고 핵겨울이 발생합니다. 과거의 문명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살아남은 인류는 나노머신을 몸에 주입하여 쉽게 육체를 개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인식과 육체를 동시에 바꾸는 계기가 됩니다. 과거 기록은 있지만 정작 그 사회는 붕괴가 되면서 의미가 없어집니다. 나노머신은 비윤리적이라고 말할 사람들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나노머신으로 자신을 바꾸게 되었고 그만큼 쉽게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건 아니었습니다. 인간들은 조금 더 과격해지고 더 세밀한 취미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들이 즐기는 문화는 현재와 그렇게까지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문화는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상호교류에 의해서 양식으로 성립됩니다. 모든 인간이 종의 흐름에서 벗어나 개별적인 존재가 되면서 그 모든 건 의미가 없어집니다. 남아있는 모든 존재는 개별화가 되었고 사회라는 건 그저 과거 인류의 유산처럼 남아있을 뿐입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따라오는 무력감과 권태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끝없이 쾌락과 취미에 몰두합니다.

그건 영생과 다름없는 삶을 누르게 된 존재가 가질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일까요?

 

작품 내에서 인류는 그 강화된 육체로 다양한 일을 하지만 정작 우주는 탐사하지 않았습니다. 시연은 우주에서 사고가 났을 때, 불멸과 다름없는 육체로 우주에 영원히 표류하게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렇지만 잘만 생각해보면 해결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영원한 표류가 두렵다면 나노머신을 이용해 편안한 죽음을 받아들이게 할 수도 있고 거주할 수 있는 행성을 발견했을 때까지 가사상태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육체를 개조하여 구조 신호를 보낼 수 있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해결 방법을 생각하기 보다는 도전하기를 포기하였습니다.

진화의 끝을 맞이한 인류이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그건 그들이 생존자이기 때문입니다. 대지진을 시작으로 나노머신이 발명될 때까지 인류는 정말 많이, 그리고 끔찍하게 죽었습니다. 100분의 1로 줄어들었으니까요. 그들은 그대로 인류의 미래가 되었습니다. 100 1은 적은 비율이 아닙니다. 취업이나 진학에 대해서 생각하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적어도 1에 든 집단이 어떠한 경향을 가지게 되기에는 충분합니다. 생존을 위해서 노력한 집단과 개인이 더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매일 죽음을 접하며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새끼 때 굶은 동물은 나중에 먹이가 충분히 공급되어도 다른 개체에 비해 식단을 통제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비록 동물보다는 나은 방식으로 표현할지는 몰라도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시연의 시점으로 전개되고, 그리고 시연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하기에 인류가 권태에 빠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시연도 대지진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라는 걸 생각한다면 인류에 대한 관점이 그리 객관적이라고 보기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트라우마는 나이를 가리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완벽하게 통제된 환경에서의 쾌락과 모험만을 추구하는 건 그 시기를 거친 세대에게는 당연한 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열악한 환경과 공포에서 자랐으니까요. 특정한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해도 쉽게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트라우마란 그런 것이니까요. 과거였다면 한 세대의 트라우마는 세대를 거치면서 조금씩 바뀌었을 겁니다. 새로운 세대와의 대화와 토론과 말다툼 혹은 죽음으로 말이죠.

하지만 나노머신이 등장하면서 다른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대로 상처를 가진 세대가 계속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아이를 낳거나 기억을 지운다고 해도 이미 주변의 모든 방식이 과거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회의 변화의 주도권을 과거 세대가 쥐고 있으니 다음 세대는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렵습니다. 인간들은 점점 자신만의 취향에만 깊게 파고듭니다.

해결하는 방법은 생각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인류가 동시에 기억을 지우거나 유의미한 숫자의 아이를 낳고 기르거나 혹은 인격을 지닌 인공지능을 만드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방법을 떠올리고 행동하기에는 인류는 너무 분리되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상대를 제약할 방법은 없으니까요.

타인을 바꿀 수 없으니 스스로가 바뀔 수 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뇌를 건드는 수 밖에 없지만 소설에서는 에러라는 현상을 등장 시키면서 제약을 둡니다. 그나마 도전정신을 가진 사람과 인류의 가능성을 믿은 사람들은 모두 에러가 되고 처분 되었습니다. 생각은 더욱 공고해지고 사람들은 더욱 보수적으로 바뀝니다.

 

소설 내에서 인간이 인간성을 지닌 채 바뀌고자 한다면 새로운 생각을 지닌 존재를 만나 자신의 생각이 인류가 아닌 세대의 것임을 자각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과거의 지식에만 머물러 있었지만 미래인보다 더욱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시아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초반에 나온 콘텐츠가 전부 혼자서 파고들거나 상대를 죽이거나 어떻게든 상대를 이기려는 경쟁이었지만 시아가 우주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인간들이 협력을 한다는 묘사가 나타나는 건 흥미롭습니다.

두 여성의 우정과 사랑을 주로 다룬 작가의 다른 작품과 달리 이 작품에서의 시아의 위치는 조금 독특합니다. 시연과 시아는 연인이나 친구라기보다는 모녀에 가깝습니다. 시연에게 시아는 보호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생각을 고쳐먹고 시아의 생각에 동조를 하죠. 어떻게 보면 상당히 익숙한 구도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친구에게 시아를 딸과 비슷한 존재라고 소개한 시연의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그 말처럼 시아는 그 시대의 진정 새로운 세대에 해당하니까요. 어쩌면 영생이 아니라 중요한 문제를 외면하면서 권태를 느끼는 게 아닐까요. 만약에 시아가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우주로 나아간다면, 그건 시아 개인과 상관없이 인류가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S.

작가분은 <우리들은 언제나 섬에 살았다>의 제목을 영화 <아일랜드>에서 따왔다고 말합니다. 영화 <아일랜드>에서 아일랜드는 격리된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생활할 수 있는 이상향입니다. 그 말처럼 부상과 죽음의 두려움 없이 모든 콘텐츠를 생생하게 즐길 수 있는 건 어떻게 보면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처를 마주하고 치료하기 보다 그저 잊기 위해서 쾌락에 빠져든다는 점에서 그 이상향이 과연 이상향이라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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