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애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성애자인 앤드류 솔로몬이 쓴 책 중에 <부모와 다른 아이들>이 있습니다. 신동의 평범한 부모, 농인의 비농인 부모, 범죄자의 비범죄자 부모 등 자신과 다른 자식을 낳고 기르는 부모들을 인터뷰하고 관찰하여 쓴 책입니다. 이 책에는 자폐인 자식의 비자폐인 부모를 다룬 챕터도 있습니다. 자폐의 대표적인 증상은 타인과 감정의 교류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무한한 사랑을 주어도 그 사랑에 반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자식을 부모는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자식을 위해 ‘지독하게 희생’할 수 있을까, 가 이 챕터의 질문입니다. “부모들은 그들의 사랑이 자녀에게 무용지물일까 봐 두려워하고, 그들의 사랑이 부족해서 자녀를 완전히 파괴할까 봐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들 입장에서 어느 족이 더 나쁜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p.409)”
자폐인 아이를 둔 부모들은 아이를 비자폐인과 똑같이 만들려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아이에게도 행복할까, 이 아이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자신으로 두었을 때 더 행복했던 것 아닐까를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그 모든 과정은 격렬하고, 부모들은 이혼이나 우울증 같은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자식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을 때 등을 돌려버리는 가부장은 자식을 개인이 아니라 ‘대를 이을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그랬겠지요. 딸을 교환가치로 보는 아버지와 달리, 사파이어 공주의 어머니는, 부모가 아니라 대자대비한 신 같습니다. 공주가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엄마에게서 많은 감정을 읽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이 이야기를 공주의 어머니, 왕비의 입장에서 다시 쓴다면 그것은 사랑, 자책, 죄책감, 원망, 희망, 절망 등 천 개의 감정과 만 개의 마음이 돌풍과 벼락과 해일이 되어 몰아치는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정을 배워야한다며 그런 유모를 붙여둔 자신을 자책하는 밤도 왕비에게는 있었겠지요.
적절할 때 적절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걸까요. 우리나라 드라마(특히 막장 드라마)를 보다보면 ‘착한 여주인공’의 전형이 있습니다. 순수-착함-욕심없음-호구-민폐…로 이어지는 패턴인데요. 착하다고 원하는 게 없고, 남에게 싫은 소리 안 들으려고 반드시 남이 하자는대로 해야 하는 건 아닌데 말이죠. 감정이 없다고 욕망이나 지능이 없는 건 아닐 겁니다. 오히려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머리 좋은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가 죄책감 없이 남 밟으면서 치밀하게 머리써서 회사의 요직에도 오르고 연쇄살인도 할 수 있지요. 왕비가 죽었을 때 남들 눈치 보면서 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주입식 학습으로 ‘이런 경우엔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한다’고 철저하게 배워서 결혼 첫날 ‘거짓미소’를 지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공주님이 주체적이어서 ‘내 감정은 나의 것!’이라는 심정으로 막 나가는 인물은 아닌 것 같은데요. 결혼 후 남편이 바람을 피울 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감정 없이 남편의 여자와 남편을 처리(?)할 수도 있을 텐데요. 궁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생계를 꾸리려는 생각이 없는 걸 보면 공주에게는 오로지 그 자신의 감정 외에 아무것도 외부에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요.
여자에게 감정이 없다,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여자들과 일하기 싫어하는 것들이 흔히 내세우는 핑계 중에 ‘여자들은 너무 감정적이야’ ‘여자들은 툭하면 울어’ 가 있는데요. 여자가 고위직에 오르면 꼭 ‘엄마같은 리더십’ ‘세심하게 챙기는’ 이 수식어로 붙고요. 늘 딸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엄마와, 엄마와 달리 엄마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딸의 관계는 어떤 걸까요. 여자에게 요구되는 ‘감정노동’을 할 수 없는/하지 않는 공주는 어떤 여자일까요. 왕비로서의 야망, 아내로서의 욕구, 개인으로서의 욕망이 없어 보이는 엄마가 자신과 다른 딸, 그럼에도 자신처럼 왕비가 될 딸을 볼 때의 마음은 어땠고 소망을 뭐였을까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엄마의 불행보다는 감정을 느낄 수 없어서 불행하지도 않은 딸이 차라리 더 나은 걸까요.
<부모와 다른 아이들>에서 부모들은 세상과 싸우고 자식을 돌보고 보호하느라 수면을 뺏기고, 그러면서도 자식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것이 사랑인지 무엇인지 부모들도 저자도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공주님이 죽을 때까지 쥐고 있었던 로켓의 의미를 공주도, 다른 사람들도 끝까지 몰랐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은 공주님의 기록들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을까요. <부모와 다른 아이들>에 나오는 아래와 같은 말이었을까요.
“나는 말로 확실히 표현될 수 없는 생각이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부분에서 벤(자폐증 아이)에게 많이 배웠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이 혼란스럽게 뒤엉켜 있을 때조차 그를 한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p. 448)”
“부모 스스로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그 감정이 얼마나 강렬한 지 알 뿐이다.(p. 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