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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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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라는 주제는 의외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옆 동네인 일본에서는 하도 많이 나와서 질려버릴 정도의 주제 중 하나라고도 합니다. 그것의 진위는 차치하고도,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혼자선 살아갈 수 없는 본성은 필연적인 욕구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흔하게 창작되는 것이겠죠. 소설의 내용이 뻔하고 흔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쓰이는 주제가 그렇다는 거죠. 이 때문에 현대에 이르러 주제는 어떤 식으로 비틀거나 변형하거나 변주하는 지가 중요해졌습니다. 뻔하되 뻔하지 않은 느낌을 주는 것. 주제를 다룰 때 알 것 같으면서도 긴가민가한, 이런 테크닉이 요구됩니다.
투명한 아침의 경우 무면증이라는 가상의 병을 다룹니다. 이 병은 머리가 통째로 투명해 보이는 질병입니다. 모든 것이 이전과 똑같고 달라진 것은 단 하나 뿐인데, 그 단 하나라는 게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주인공의 일상은 격변합니다. 모두가 관심을 갖고 신기해 합니다. 하지만 그 관심 속에 주인공에 대한 존중은 없습니다. 그저 낯선 존재에 대한 경이가 관심의 함량에 전부입니다. 이로 인해 회사는 재택 근무를 권유하고 홍보에 쓰고자하며, 병원은 실험체가 되길 권유하고, 길거리에서는 유튜버가 광대가 되기를 권유합니다. 모두 머리가 없다는 현상 만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자극이란 역치가 존재하고 그것은 식어가기 마련입니다. 어느새 주인공에 대한 관심은 식어가며 사람들은 그런 주인공을 다시금 사람으로 대합니다. 사람으로 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여기에는 주인공의 태도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자신과 평범함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소외시키기 보다는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것은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앞서 말한 이익의 도모 때문에 마음이 찢겨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럼에도 주인공은 스스로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얼굴만이 자신이 아니라, 몸짓. 목소리, 말, 행동 모든 것이 자신이 구성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얼굴은 의외로 다양한 함의를 갖지 못한다고, 소설은 이야기 합니다. 얼굴은 인간이 인간에게 느끼는 미의 척도입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할 때 서로를 인식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 주인공은 곤란을 겪습니다. 그렇지만 곤란의 정도는 그 뿐이라고 말합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다고 변할 것은 없다고. 나는 나 자신이며 그 것은 변하지 않을 사실이라는 것을요. 그리고 그 뿐으로 족한다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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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다뤄지는 무면증은 장애가 아닌 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이 지점으로부터 다양한 시의성을 함의합니다. 장애와 비장애인의 차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얼굴을 갖지 못한 자들은 일종의 소외된 이들의 은유로 읽혀집니다. 얼굴은 소통할 때 서로를 인식하는 수단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말을 할 때는 주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며, 사람의 개체적 인식의 특징을 이름이라는 부수적 수단 외에 얼굴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얼굴을 잃어버린 자들은 사회에서 의견을 내기 어려운 인물들로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장애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평범함을 강요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에서 벗어난 이들을 묶습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인식하라며 다그칩니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기업이라면서 홍보에 이용하려 하기도 하고, 유튜버처럼 장애의 특징적인 부분만을 강조하며 즐길 거리로 전락 시키거나 합니다. 홍보에 이용한다는 것은 일종의 시혜적인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다양성이라는 명명 하에 조직에 속할 수 있게끔 할테니 장애라는 정체성을 이용하겠다는 폭거입니다. 즐길거리로 전락 시키는 것은 인간성을 마모시키는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누구에게 단지 태어났다는 이유로 웃음을 살 이유는 없습니다.
이 양상에 장애인 본인은 없습니다. 사람이 선택해서 장애를 갖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본질이 사람이라는 것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온전히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문명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사회가 된 때를, 부러졌다가 합쳐진 대퇴골을 예시로 저명한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1901~1978)가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사회라는 큰 틀안에서 사람은 서로 함께 살아가고, 그 안에서 장애는 함께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 좀 고민됩니다. 이렇게 정상성을 타파하고자 한다는 이야기가 자칫 당사자들에게는 시혜적으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에서 느껴지는 낭만적인 부분은 이에 기인할 것입니다. 장애를 가짐으로써, 회사에서 권고 사직을 권유 받게 된다면 어떨까요? 유튜버가 주인공의 분명한 거부에도 강행했다면 어떨까요. 주인공이 남들에게 자신을 보이기를 거부하고 은둔할 수 밖에 없는 심리 상태로 전락한다면 어떨까요.(우울증이라는 게 참 쉽게 옵니다. 다들 조심하세요···.) 그렇기에 더 큰 목소리로 이야기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작품은 이야기합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점에서 용기 낼 수 있다고. 그리고 나아갈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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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투명한 아침이라는 은유적인 제목도 좋았지만, 무면증이라고 소재를 언급하는 것도 괜찮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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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다소 의아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대학 병원을 가는 것이었는데요. 대학 병원은 대개 일반 병원에서 의뢰서를 받은 다음 예약을 한 후에야 방문이 가능합니다. 보통 전담 교수와 면담이 이뤄지는데요. 예약한 시간에 방문하지 못해 진료 시간을 놓친 경우에는(경험담입니다… 머쓱타드;) 임상 강사에게 진료를 봐 약을 타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케이스가 있긴 합니다. 다만 이게 초진에도 적용되는 지, 제가 다니는 외래 진료과만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해당 과정을 추가하는 것으로 내용적인 부분을 보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