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당신들은 왔지. 독자들을 위해서. 공모(감상)

대상작품: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 (작가: 이영도 출판, 작품정보)
리뷰어: JIMOO, 11시간 전, 조회 13

초대받은 별장에서 손님인 한 사람이 죽었다.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목격자는 없다. 범인의 얼굴을 알고 있을 사람은 피해자뿐이다. 이 답답한 상황에 마법이 아닌 기적이 일어난다. 어스탐 경은 임사상태로 바닥에 피로 글을 쓰고 있는 채 발견된다. 사람들은 그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다주고 일으켜 세워 의자에 앉혔다. 모두가 기다리는 건 범인의 이름이 쓰이는 순간이었다.

그럼 이제 범인의 이름을 가지고 수사를 시작하고 동기를 파헤치면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문제가 있다. 어스탐 경은 유명한 소설가였으며 단편 소설가도 아닌 장편 소설가였다. 임사전언은 단순히 범인의 이름만 쓰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 작가가 마지막 작품을 쓸 기회였던 것이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근데 장편 소설가라고? 설마? 그렇게까지 쓰겠어? 이 지점에서 느껴지는 당신의 불길한 예감은 여러 사람이 뒷목을 잡고 환장하게 하면서 적중하고 만다.

그래도 그렇지. 4년 동안, 9권의 책이 나올 동안, 범인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범인 대체 언제 잡냐고. 독자들이 눈을 부릅 뜨고 기다리고 있는데 너무 하지 않나. 문제는 또 있다. 어스탐 경을 죽일 동기가 충분한 네 명의 용의자가 있다. 하지만 이건 소설이고 소설이란 건 늘 그렇듯 작가가 쉽게 범인이 누구다말해주지 않는다. 게다가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이놈이 범인인가?’ ‘저놈이 범인인가?’ 헷갈리게 만들면서 잘못된 함정으로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가는 족속이 아닌가?

모름지기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만 안다는데, 경청해도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못 알아듣기 마련이고, 소설은 더 그렇다. 결말을 읽기 전에는 다 알 수 없고, 전체를 읽었다 해도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오독하게 된다. 어쩌라는 걸까? 정말 특이한 살인 사건이다. 사건의 피해자라면 자신을 죽인 범인이 밝혀지길 바랄 것이고, 소설가라면 독자들이 자신의 의도대로 충분히 헤매다가 진실을 알게 되기를 바랄 테니까. 소설가이면서, 피해자인 어스탐 경을 보는 독자의 시선은 혼란스럽다.

수사 책임자는 환장할 노릇이다. 어스탐 경이 아니면 다른 방법이 없는데 그의 글에 기대기엔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밤낮 홀로 글만 쓰고 있다. 언데드가 되어버린 사람이 쓰는 글이 제대로 된 내용일지 판단하기도 어렵다.

범인은 그런 어스탐 경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자신의 이름이 두렵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검열자가 등장한다. 드디어 이야기의 완결이 가까웠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검열자가 범인의 조력자가 아닌지 의심한다. 아니면 새로운 범인이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스탐 경의 임사전언>을 읽으며 그동안 나는 어떤 독자였을까? 생각해 봤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어스탐 경과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면? 범인이 빨리 밝혀져 처벌받길 바라면서도, 이야기의 결말이 너무 빨리 난다면 작가의 글을 더 읽을 수 없게 되는 거니까. 조금이라도 천천히 결말이 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갈등하지 않을까? 그런 걸 보면 애독자는 작가가 건강하길 바라고 오래오래 작품을 보길 원하지만 그 마음이 꼭 작가를 위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이 책을 통해서 하게 되었다. 작가가 더 많은 글을 써주길 원하는 독자의 바람은 작가가 그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시간보다 스스로 골방에 들어가 고독하게 글을 쓰길 바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스탐 경에게 일어난 기적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행복했을까? 오히려 불행했을까? 자신을 죽인 범인을 밝히는 일은 독자가 가장 궁금증을 품고 기다리는 일이었지만 끝의 끝까지 미루어 두었다. 그 사람은 결말에 도달하기까지 자신이 풀어놓는 이야기를 읽어주길 바라면서 그 시간을 상상의 독자와 함께했다는 생각도 든다.

경의 고독은 경의 책임이라는 말처럼 그건 그의 선택이었지만 만약에 어스탐 경의 글이 더디게 쓰였더라도, 사랑하는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자신에게 주어진 기적의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그렇지만 어스탐 경이 글을 쓰는 시간이 불행했을 거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서로를 그렇게 쉽게 이해하고 이을 수 있다면 자기 마음 좀 알아달라고. 기억해달라고 외치는 책들이 왜 그렇게 많이 쓰이겠습니까?’ 이 말처럼 작가는 이해를 바란다 해도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독자는 작가를 이해할 수 없다. 어스탐 경은 독자에게 온전한 이해를 받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글을 썼다.

그럼에도 그는 그가 죽길 바라던 사람들까지도 독자로 만들었다. 그가 대체 왜 그렇게까지 글을 썼는지 읽으며 이 사람은 자신에게 어떤 사람이었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스탐 경은 마지막 남은 자신의 시간과 목숨을 바쳐서 독자를 만나러 갔다. ‘작가의 최종 목적지는 언제나 독자니까.’ 작가는 자신을 거울로 만들고 독자는 거울 속 자신을 본다. 독자인 우리가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필연적임에도, 독자가 글을 읽고 떠올리는 순간마다 그 시간은 되살아난 어스탐 경을 만나는 귀중한 시간일 테니.

태어나버려. 까짓것.”

집필실 안에서 어스탐 경의 손이 움직였다.

어떻게 표현하냐가 중요한 거죠. 어쩌면 그런 사람이 위험하고 고통스러울 것이 빤한 도전에 주저 없이 뛰어들어서, 그런 도전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결과를 손에 쥘 수도 있지 않을까요?”

당신이 원할 때, 내가 당신을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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