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人災)가 만든 세상의 전경 <루세온 : 진실의 기록> 감상

대상작품: 루세온 : 진실의 기록 (작가: 기록관리인, 작품정보)
리뷰어: 소나기내린뒤해나, 51분 전, 조회 7

 

목차

1.문서(text)의 향연은 어떤 맛인가요?

2.죽은 자들과 공유하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3.기록의 바깥, 독자의 능동적 상상력을 기다리며.

 

 


 

 

 

1.문서(text)의 향연은 어떤 맛인가요?

 

소설이라는 매체 또한 형식의 변주라는 역사를 거치며, 극중에 나오는 ‘문서’를 구체화하는 방식을 제시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중에서도 ‘문서(Text)’ 그 자체를 소설의 형식으로 제시하는 방식을 ‘서간체(Epistolary) 소설’ 또는 ‘발췌록(Documentary) 형식 소설’이라고 명명합니다. ‘브람 스토커(Bram Stoker)’의 <드라큘라(Dracula)> 혹은 ‘메리 쉘리 (Mary Shelley)’의 대표작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또한 작중의 배경에서 작성된 일기를 비롯한 ‘문서(Text)’를 제시하는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발췌록’에서 보여주는 효과는 현실감의 극대화로 정의됩니다. 일기, 편지를 비롯한 문서들이 작성되었을 정황이 곧 현실성으로 이어지며, 그 문서를 작성한 주체의 배경을 능동적으로 추측하게 만드는 것으로 독자들의 몰입을 이끌어냅니다. 그 과정에서 해당 문서를 작성한 ‘주체’에게 오로지 집중하게 만드는 것 또한, 관련 형식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두가 지루했습니다. 요새 정독하고 있는 <루세온 : 진실의 기록>을 말하자면, ‘발췌록’이라는 형식을 응용하면서도 그 문서들이 집중하고 있는 시선에서 색다름을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습니다. ‘루세온’이라고 불리는 백신의 부작용으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시대를 맞은 인류를 배경으로,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인간들이 남긴 수많은 기록들을 한 데 모아 소개한다는 컨셉을 제시하며, 뛰어난 필력과 고증이 높은 문서들로 인해 생동감을 잃지 않는 솜씨가 매력을 주고 있죠.

 

이 작품은 회차 하나하나가 물리적인 분량만큼은 짧은 면에 속합니다. ‘문서’라는 형태를 고려하더라도, 여느 독자들이 관습적으로 상상하는 ‘소설’의 틀에서 무척 간략화 된 면이 있지만, 그 뒷면에서 기록이 작성된 정황을 상상하는 것으로 그 깊이는 배가 됩니다.

 

이 감상문에서는 <루세온 : 진실의 기록 (이하 ‘루세온’)>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발췌록’의 변주를 살펴보고, 이 작품을 더 깊게 읽을 수 있는 방식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2.죽은 자들과 공유하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가요?

 

앞서 발췌록의 형식이 주는 효과에 대해 ‘문서를 작성한 주체에게 능동적으로 집중하게 만든다’는 요소를 언급했습니다. 말 그대로, 소설 내에서 ‘문서’가 주는 효과는 직관적인 정보의 전달 이상으로 그 배경에 있는 주체에 몰입하는 효과를 준다는 의미도 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루세온>은 조금 다른 지점에 눈을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기록’이라는 컨셉에 걸맞게 ‘문서’ 그 자체를 형상화한 듯한 구성도 독특하지만, 그 너머에 독자들이 사고를 뻗기 시작하는 순간에 엿보이는 이야기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무언가를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루세온>의 표면적인 이야기는 흔히 ‘좀비물’이라는 장르로 정의되는 줄거리의 도입부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모종의 이유로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형질이 시체를 다시 살아 움직이게 만들고, 그로 인해 인간들을 혼란기와 적응기를 반복하며 대처를 찾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에서 독자들은 작품에서 소개하는 ‘기록’을 통해 이 시체를 살아 숨 쉬도록 만드는 유전자의 근원을 쫓고, 그로 인해 벌어진 일들을 단편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이 후대에 발견된 ‘기록’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현시점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시간대에서 발견되는 인류의 모습은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사라졌을 것이 자명합니다. 기록의 인류는 이렇게 되살아난 시체를 ‘재생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여느 좀비물에서 묘사되는 폭력과 혼란은 잠시 뒤로 밀어두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작품은 공간과 시간대에 구애받지 않고 정보를 전달합니다. 이 ‘루세온’이 탄생하게 된 경위부터, 그것이 인간사회로 유출되는 과정, 그리고 훗날 이 형질에 영향을 받은 시체들이 되살아나 ‘재생체’ 명명되며 사회로 받아들여지는 과정까지. 인물과 사건 중심의 일반적인 소설과 다르게, 이 작품은 특정 인물보다는 광범위한 시간과 사건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이도현’을 비롯한 기록에서 중요하게 소개되는 인물이 엿보이지만, 그 또한 이 ‘재생체’에 얽히며 벌어진 일화를 소개하기 위한 장치일 뿐 작품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의 위치는 아닙니다. 언뜻 보면, 이 작품 자체가 <루세온>의 설정집처럼 오해받을 소지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기록들이 배경설정의 필기로만 치부되지 않는 것은, 해당 기록들로 구현하고 있는 ‘사회’의 모습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1부에서 3부에 이어지는 등장하는 기록들은, 이 ‘재생체’가 등장하며 만들어지는 사회적 고민에 얽혀 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시체가 살아나는 과정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은 ‘재생체’에 대한 존재를 인지하며 혼란에 빠지는 사회를 묘사하고, 그것은 가까운 이의 죽음과 재생으로 이어지며 새로운 현상을 납득하려는 사회를 묘사합니다. 그 현상은 국가와 정부의 문제로 이어지며, 법이라는 테두리로 이 현상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묘사하기에 이릅니다. 그 모든 일화들 ‘기록’이라는 형태로 단편적으로 제공되지만, 그 단편으로 추측되는 세상은 익숙하면서도 납득이 가는 인간적 사고의 흐름을 구상합니다.

 

사실 중심인물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이 소설의 의도에서 벗어난 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서들의 주연으로 내세우는 것은 엄연히 인간이 움직이는 세상이며, 그것은 틀림없는 인재(人災)가 만든 세상입니다. 기록에서 등장하는 사체의 재생현상은 죽음을 마침표로 두던 인류의 깊은 사고를 부정하는 커다란 전환점입니다. 지질시대부터 인류가 탄생하고 멸망해가는 과정들을 세부적으로 나눌 수 있다면, 이 재생체의 등장은 인류 역사에서 선을 긋고 연구될 수 있을 만한 파급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변화는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가 나무에 불을 지피는 우연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 씨앗에는 틀림없는 인간의 욕구에서 비롯한 시도가 있었고, 현 시점에 이르러 그것은 인간의 통제하고 흡수하려는 시도로 변화합니다. <루세온>은 그 지점을 끊임없이 자각시킵니다. 재생체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사회를 주연으로 내세우는 이면에는, 결국 이 사회를 만들고 정제하는 흐름은 전부 ‘인간’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기존의 발췌록으로 독자들을 펜을 쥐고 있는 인물에게 집중시키는 형태는, 이 <루세온>이라는 작품에서 ‘사회’라는 주체로 시선을 옮기는 형태로 변주됩니다. 단순히 문서를 구상하는 형태 자체가 생동감 있다는 평도 가능하겠지만, 그 문서들로 관찰되는 인류적 사고의 흐름이야말로 작가가 색을 입히고 싶은 밑그림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3.기록의 바깥, 독자의 능동적 상상력을 기다리며.

 

<루세온>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그 문서의 질감과 형태에 크게 감탄하곤 합니다. 관련 지식이 없더라도 해당 문서들이 실제로 통용되는 형태일 거라 믿게 되는 것도, 작가 문서 하나하나에 놀라운 집중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발췌록의 형태는 필수불가결한 암막을 수반합니다. 기록의 형태와 묘사가 정확할수록 정보의 전달력은 높아지지만, 그 바깥에 있는 정보들이 절단에 가깝다 싶을 정도로 배제되기 마련입니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넓은 시야와 깊은 사고들은 그런 정보의 절단을 무마할 만한 힘이 있다고 판단합니다만, 대사 한 줄을 읽고 수많은 해석을 낳을 수 있는 독자들의 태도를 고려하면, 오히려 이런 기록을 해석하고 추측해야하는 범위는 대사 한 두 줄 이상으로 축소될 수 없는 무언가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글을 읽는 분량은 많지 않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사고를 쏟아야만 뒤편에서 아우성치는 목소리들까지 귀에 닿는 경우도 더러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저야말로 그런 해석에 들이는 힘을 요구하는 것이, 이 <루세온>의 매력이라 강조하고 싶습니다.

 

문득 이 기록들을 만들고 계신 작가님 스스로는 ‘시나리오(scenario)’성을 의식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한 회가 끝나고 작가님 본인의 해설을 덧붙이는 것 또한, 해당 발췌록에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오독이나 함축적인 의도의 미스매칭(오해) 등을 걱정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납득이 가는 시도입니다. 여느 소설이라면 몇 가지 오독을 해석의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관점을 제시할지도 모르지만, 정보 그 자체를 전달하는 글에 오독은 치명적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니까요. 소설을 읽는 방식은 독자마다 다르다고들 말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에는 단 하나의 방식으로 하나의 해석을 쫓을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읽는 난이도가 제법 높다고 판단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세상의 모습은 해석의 수고로움을 감수하고서도 관찰하고 싶은 매력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장례식장에서 시체가 깨어나는 일화를 보고 그 충격에 공감하는 정도에 그치겠지만, 또 누군가는 그 시체가 깨어나기까지의 경위와 기록에 담기지 않는 뒤편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고민들을 추측해봅니다. 이 작품을 완성시키는 묘사는 문서 바깥에서 밑그림만 남은 채 독자들을 기다립니다. 그 광경을 보지 못 하고 돌아가는 독자들이 아쉬울 수 있겠지만, 결국 그 지점에 도달하는 독자들을 위해 이 작품은 움직입니다.

 

현재 <루세온>은 4부에 이르러 이 재생체를 완벽하게 통제했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만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그들의 묘사 너머에서 의미심장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과연 <루세온>이 보여줄 인재(人災)의 결말은 무엇일까요? 앞으로도 그 세상을 느릿하게나마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려드리며, 이 부족한 감평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인상적인 작품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멋진 집필 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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