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빚이 있다. 20년 전, 황금가지의 첫번째 작가에게. 그는 내게, 아니 모든 독자들에게 비평을 원했다. 다만 그 때의 나는 그 요구사항이 어려웠다. 내 마음이 느끼는 감상이, 단순한 소감을 넘어 비평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몰랐고, 그 배움은 나의 길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 때의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이 하고팠을까. 갓스물 젊은이의 치기에 무에 그리 아쉬울 것이 많아, 그 많은 밤을 활자와 지새며 울고 또 웃었을까. 그 때를 더 이상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마치 그와 같은 냄새를 풍기는 글을 20년 후에 만났다. 또다른 활자 앞에서 예전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은 채로, 잔향 같은 감상만을 어렴풋이 떠올릴 뿐이다. 그 위로, 20년 전의 외면이 빛나는 활자 채로 숙제처럼 떠오른다. 그에, 이 글을 쓴다.
두번째 작가의 ‘피어클리벤의 금화’는 첫번째 작가의 냄새가 난다. 환상문학 깨나 읽은 이라면, 서장을 읽자마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 자체를 잘 구사하는 글쟁이가 부리는 재주의 참 맛과, 몇 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독자의 흥미를 잡아채는 화술의 영활함이 사뭇 닮아있음을.
이 작품은 맛있다. 페이지를 넘기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 향과 맛의 만족이 잔잔히 남는다. 오랫만에 만나는 맛나는 수작이다. 다만, 입안에 걸리는 가시같은 아쉬운 점은 몇가지 있다. 개중에는 그냥 씹어넘길 수 있는 사소한 흠도 있으나, 요리를 떠나 요리사에게까지 염려가 미치는 부분도 보인다.
따라서, 아쉬운 부분만을 평으로 남긴다. 몇 점의 가시를 제외하면 모두 만족스러운 작품이기에, 아쉬운 부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므로.
하나. 시점의 불일치 및 흔들림이 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이라는 독특한 장치로 호평을 받은 첫번째 작가의 강호초출작처럼, 두번째 작가의 이 작품도 인물의 시선을 관찰자 삼아 상황을 비트는 재미를 잘 보여준다. 다만, 이 인물의 화자화(話者化)는 상황마다 변하며, 작가가 원할 때 원하는 인물(주로 여성이다)만 화자가 된다.
첫번째 작가의 강호초출작은 그 화자를 단 한 명의 소년으로 국한했다. 가장 자신 있는, 그리고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소년이 없었던 곳의 이야기를 동료의 입을 통해 듣게 되더라도, 이 불편한 장치를 끝까지 유지해 겨울 헬턴트 영지의 마지막 이야기까지 독자를 성공적으로 밀어넣었다.
그에 반해, 이 작품의 시점은 그때 그때 작가가 이입하고픈 인물을 위해 흔들린다. 이야기의 초반은 그 인물이 주인공에게 집중되어 있으나, 이후로는 다양한 인물을 넘나드는 시점 변환에 이야기의 진폭이 흔들려, 예민한 독자는 멀미를 느낀다.
둘. 이야기의 요소 중 일부가 비어 있다.
문학이 어차피 문자를 통한 예술이므로, 모든 표현은 문자를 거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문자로 표현해야할 것이 상황, 사건, 그림, 동작, 감각 등이 있다고 한다면, 이 작품은 ‘사건’에만 치중하여 이야기를 끌어간다. 나머지 요소들은 최소화되어 있다. 그것이 의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나머지는 작가의 취향에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하나의 강점이 매우 뛰어난 것은 맞다.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두드러진 장점은 분명한 상품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한 가지 색만으로 그린 그림은 충분히 아름답지 못하다. 밀 이삭의 황색과 햇살의 금색이 지평선을 두고 달라지듯, 한 폭의 그림에는 나머지 요소가 있어야 충분히 아름답다. 광원과 그림자에 의해 드리우는 부드러운 그라데이션처럼, 매력과 공백 사이가 자연스럽게 메워지길 바란다.
셋. 남발되는 참신함은 지루함만 못하다.
참신함은 마치 식초와 같다. 포인트로 쓴 소량은 상쾌함이 되나, 과하게 적시면 혀를 피곤하게 할 뿐이다. 이야기의 진행 방식도 마찬가지.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모든 사건이 한가지 방법으로만 해결된다면 그 방법이 아무리 참신해도 재미를 잃을 수 밖에 없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칼로 베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다.
독자의 입장에서 가장 재미없는 이야기는 뻔한 이야기다. 신데렐라 스토리의 n번째 스핀오프로 만들어지는 드라마들처럼, 다른 설정과 환경 그리고 신선한 소재가 주어졌음에도 어차피 뻔할 이야기라면 독자의 두근거림은 빠르게 가라앉는다. 이 작품의 끝이 아직 오지 않았으나, 그 여정까지에 이르는 모든 매듭을 똑같이 벨 것 같은 염려는 과연 기우로 끝날 것인가.
넷. 전개 템포의 강약이 없다. 아니, 정확히는 해방이 없다.
이는 이 작품만의 문제만이 아닐 수 있다. 최초 환상 문학의 태동기에 정상적인 등단의 기회가 건재했던 것과 달리, 현재 한국 사회의 문학 시장은 쇠퇴기에 들었다. 온전히 온라인 상에서 인지도를 얻어야만 하는 지금의 상황이 작가를 조회수와 바이럴 효과에 민감해지도록 진화시켰으며, 이는 어쩌면 환경에 적응한 적자생존의 결과일지 모른다. 매 회, 한 꼭지마다 독자로 하여금 다음 페이지를 열망하게 만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스낵컬쳐의 정글에서.
다만, 작가의 발자욱을 뒤따라 밟아오는 이의 입장에서, 모든 흔적이 모두 숨가쁘다. 집필 때마다 자신을 불태우는 작가와는 달리, 독자는 그 결과물을 일상 속에서 읽는다. 낮동안 숨가쁜 일상을 달리다 밤과 함께 쉼터로 돌아와 잠드는 것처럼, 매 챕터마다 이야기는 마치 하루같은 리듬이 필요하다. 롤러코스터조차 짧은 질주를 앞두고서 한참을 기어올라가듯, 읽는 이 역시 긴장과 몰입에 적셔질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여백은 그림의 일부이며, 비어있는 음역대 또한 음악의 구성 요소인 것처럼.
마지막으로, 이야기에 작가가 너무 잘 보인다.
법학 또는 행정학을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여성. 아마도 고시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해야함에도 하기 싫은 것들에 대한 편식. 남성 위주로 쓰여온 환상문학 또는 그 이상을 여성의 이야기로 바꾸고 싶어하는 욕망.
물론 이는 지레짐작 또는 넘겨짚기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창작물은 창작자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롯이 창조자의 피조물이며, 창조자의 호흡, 손길, 습관을 닮기 마련이다. 나의 사고는 내 두뇌를 벗어나 존재할 수 없고, 나로부터 태어나는 작품은 결코 내 한계의 지평선을 넘어설 수 없다.
늘, 창작자는 자신을 작품에 내보임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창조물에서 자신이 보인다는 것은, 창작의 과정에서 적지 않은 나의 ‘피’가 흘러나왔음을 뜻하므로. 물론, 내가 무한한 폭과 깊이의 인격을 가진 성인(聖人)이라면 설사 나의 파편쯤 떨어져 나가도 문제될 것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그렇지 않은 그저 인간이기에, 모든 창조의 행위에서 발생하는 ‘나’의 손실이 창작자로서의 생명을 갉는 것을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창작자는 계속해 자신을 살찌워야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경험, 가보지 않았던 곳에 대한 모험, 옛 것에 대한 철저한 고찰,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 신체와 도구를 다루는 기술의 수련, 공상을 극대화해 설계한 청사진들. 작품을 통해 배어나오는 것이 그렇게 내가 얻은 땀이어야 하지, 나의 본연을 이루는 핏자욱이어서는 곤란하다.
20년전 걸출한 천재의 등장에 열광했던 갓스물의 청년은 가고, 가능성을 가진 자를 후원하고픈 꼰대만이 여기 남았다. 이 작품은 다년간 만족한 적 없는 그 꼬장꼬장한 입맛을 만족시킨 몇 안되는 수작임을 분명히 보장한다. 다만 꼰대의 버릇이 남아 그 만족 중 아쉬운 몇가지만을 얘기하고자 함에도, 직설적인 표현이 의도보다 더 단점을 부각시킬 위험은 있다. 그래서 이 글이 두번째 작가에게 독평(讀評)일지, 독평(獨評)일지, 독평(毒評)이 될 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찬사만을 받아왔을 그대에게 이 글은 지나치게 아플지도 모른다.
허나,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히 흐른다. 그대 역시 이 집필이 끝나면, 시간의 낱장을 한 데 묶어 책으로 낼 것이다. 그 여정의 끝까지 무사히 완주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대에게 두 번째의, 세 번째의 집필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 기회를 통해 지금 이 첫 작품이 단지 요행이 아니었음을 그대가 증명해내길 바란다.
이제, 그대의 시간이다. 모쪼록, 카리스 누멘의 모루와 망치의 불꽃의 정수가 그대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