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호전>, 또는 <수호지>라 불리는 중국 소설을 알고 있을 것이다. 108명이나 되는 영웅호걸들이 나와서 활약하는 소설. 이 소설을 관통하는 사상은 결국 ‘세상 사람들은 모두 형제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작중 108명의 인물들은 모두 의형제를 맺고 서로를 호형호제하며, 그들이 내세우는 이념은 체천행도(替天行道)와 충의쌍전(忠義雙全)이다. “하늘을 대신하여 도를 행하고”, “충과 의를 모두 온전히 지킨다”는 뜻으로, 부패할 대로 부패해 더는 손쓸 도리가 없는 북송 조정을 개혁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것이다.
<잿빛 숙청 7년 후>를 읽으며 자꾸 <수호전>이 떠올랐던 건 우연이 아니다. 총사령관 칼레나는 실레온으로 인해 가족을 모두 잃고 떠돌고 숨어 지내며 실레온에게 복수를 꿈꾸는 사람들, 이미 죽음 직전까지 몰린 사람들을 하나둘 만나 동료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사령관’이라는 직책을 내린다. 초반부에 읽어서 정확히 몇 명인지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어림잡아도 20명은 훌쩍 넘었던 것 같다(아, 공지에 있네).
거기다 <수호전>에서 그랬듯 실레온이라는 존재로 인해 이 소설 속 나라 역시 완전히 엉망이 되어 있다. 말 그대로 혼란 그 자체다(본편 마지막 전투를 보면 알겠지만 거진 대마왕 급이다. 빨리 죽지도 않는다.)
이들은 스스로를 ‘반란군’이라 칭한다. 아마 이 소설을 본편부터 처음 읽는 대부분의 독자가 이 대목에서 한 번쯤 물음표를 띄우거나 피식 웃음을 흘리게 될 것이다. 대체 이 중2병스러운 이름은 뭔가 싶고, 최종 악당의 시선에서나 ‘반란군’이라 불릴 이들이 스스로를 반란군이라 자처한다는 설정도, 게다가 ‘사령관’이라는 직함을 가진 인물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도 처음엔 다소 이상하고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연재되고 있는 외전을 따라가다 보면 왜 하필 ‘반란군’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가 드러난다. 칼레나가 그 수많은 ‘사령관’들을 어떻게 만났는지, 그들 각자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가 마치 프리퀄처럼 하나씩 펼쳐진다.
그들이 허름한 지하창고에서 마침내 실레온에 맞설 세력을 만들자고 선언하고 이름을 정하려던 순간, 데려온 아이 중 하나였던 이티안이 작은 목소리로 ‘반란군’이라 말한다. 그들도 처음에 독자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다들 조금 더 그럴듯한 이름이 있지 않겠냐며 난색을 표하지만, 이티안은 마치 확신에 찬 사람처럼,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 밀어붙인다. 그러자 하나둘씩 더 이상 반대 없이 ‘그것도 괜찮은 것 같다’며 수긍하고, 결국 그들은 스스로를 ‘반란군’이라 부르게 된다(수호전의 송강도 4대 반란군인데…).
이 장면은 상당히 전형적인 전개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뭉클하다. 칼레나를 중심으로 그들의 관계가 차곡차곡 쌓여온 빌드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감동이다.
표면적으로 본편의 주인공은 칼리아, 진, 라그노스 세 아이들이다. 그러나 쭉 읽다 보면 이들이 이야기의 메인 줄기를 담당하고, 실레온과 직접적으로 얽힌 서사를 가지고 있으며, 마지막 실레온 일파와의 대결에서 각자 활약하게 될 인물들이 결국 이 셋을 기준으로 관계를 쌓아가며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주인공’으로 보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수호전> 역시 108명의 영웅이 등장하지만, 결국 송강이라는 인물이 그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것과 비슷한 구조다. 본편의 주인공이 칼리아, 진, 라그노스라면 외전의 주인공은 총사령관인 칼레나다.
만약 <수호전>을 좋아했던 독자라면, 그리고 이 소설을 아직 읽지 않았다면, 본편보다 외전부터 먼저 접해본 뒤 본편으로 넘어가는 방식을 추천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