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 씨, 오늘도 고통받는 중 감상

대상작품: 역병 씨가 인류 멸망을 시도하게 된 사유 (작가: 세르모이, 작품정보)
리뷰어: 노르바, 1시간 전, 조회 6

‘역병’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천연두, 흑사병, 스페인독감, 그리고 21세기 우리에게는 코로나. 어쩌면 손가락 튕기는 것 하나만으로 말 그대로 타노스처럼 지구상 인류의 머리수를 절반으로 줄여버릴 수도 있는 존재.

그런데 이 소설에 나오는 ‘역병’ 씨는 “얼핏 보면 황금색 같아 신비로운 눈, 오똑한 코, 은발 울프컷”으로 묘사되는 아이돌급 외모를 가진데다가, 말투는 흡사 중2병 말기 환자에 가깝다. 이 괴리감 하나만으로 이미 이 소설이 어떤 이야기일지 감이 잡힌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역병 씨가 인류멸망을 시도하게 된 사유”라니.
코스믹 호러급 스케일을 예고하는 듯한 이 제목은 소설을 다 읽고 나면 그 자체로 낚시였다는 걸 깨닫게 된다. 실제로 벌어지는 건 인류를 멸망시키려던 태초의 개념 ‘역병’이, 경찰서 취조실에서 화자인 경찰 ‘하울’을 붙잡고 자기 팔자 한탄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뿐이다.

대부분이 대화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시종일관 두 개의 톤을 오간다. 하나는 “지구에 첫 양서류가 생겼을 때 탄생했다”, “천연두는 내 혼을 담은 명작” 같은, 나름 진지하게(?) 쌓아올린 세계관 설정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은 야근 안 할 지도 몰랐다”는 하울의 직장인다운 넋두리, 취조 중에 “형사님은 본인이 형사라고 ‘생각’하시는 거세요?”라며 되레 성질내는 역병의 허당끼다. 이 둘의 낙차가 소설의 웃음 포인트를 계속 만들어낸다.

앞서 말한 아이돌급 외모와 중2병 말투의 부조화는 소설 내내 반복되는 웃음 코드다. “제 걸작”, “혼을 담은 명작” “썅것, 썅것, 썅것!!”같은 표현을 진지하게 내뱉을수록 비장미보다는 코미디에 가까워지는 구조인데, 이 어긋남이 캐릭터의 매력이자 웃음의 핵심 동력이다.

서사가 진행될수록 역병의 “정당방위” 논리는 점점 더 구구절절해진다. 인간이 자신의 작품(질병)을 박멸하는 것에 대한 서운함, 백신 개발에 대한 분노(?), 물감(질병을 만드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는 설정 등 나름의 논리 체계를 세워가지만, 그 논리를 전달하는 태도가 워낙 유아적이고 감정적이라 설득력보다는 웃음을 유발한다. 특히 흑사병으로 “거의 1억 명”을 죽이고도 “내 작품 볼 사람이 없어서” 병을 거뒀다는 대목은, 거대하고 치명적인 실제 역사이자 설정을 블랙코미디로 착지시켜버린다.

그리고 마지막 두 줄. “아, 아. 이제 감염되었네요.” “헬륨 목소리의 세계로 온 것을 환영합니다.”
인류를 멸망시키려던 ‘산소를 매개로 하는 치명적 질병’이, 얼떨결에 헬륨 목소리로 바뀌는 병으로 대체되고, 그마저도 역병 본인까지 감염되어버리는 이 결말은 짧지만 개그의 임팩트가 확실하다. 천연두, 흑사병, 코로나를 만든 존재가 인류를 멸망시키려다 결국 자기 목소리만 우습게 바꿔버리고 만 이 아이러니야말로, 이 소설이 그리는 ‘역병’이 우리가 아는 그 무시무시한 존재와 얼마나 다른지를 잘 보여준다.

 

결국 이 소설은 “인류멸망급 재앙”이 될 “뻔”하는 이야기를 시종일관 B급 개그로 다루면서도, 완전히 가벼워지지만은 않는 밸런스를 유지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확실하게 코미디 쪽으로 착지한다. 진지해질 만한 순간마다 역병 본인이 스스로 그 진지함을 깨버리는 구조 덕분에, 읽는 내내 “역병 씨, 오늘도 고통받는 중”이라는 말이 떠오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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